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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n 08. 2020

제발 부작용 좀 생기게 해 주세요!

생리컵을 지나 임플라논으로 생리 중단한 이야기



깨끗한 나라의 발암물질 생리대 파문이 터진 2017년, 생일을 맞아 나 자신에게 생리컵을 선물했다. (블로그 리뷰) 생리대를 붙인 속옷과 그 속옷을 받쳐주는 속바지로 인해 땀띠와 늘 함께 하던 여름이 한결 가벼워졌고, 몇 시간마다 주머니에 패드를 넣고 화장실로 향해야 하는 불편도 줄었다. 아주 불규칙하던 주기는 생리컵을 사용하는 2년간 점점 일정해져서, 더 이상 길을 걷다 갑자기 느껴지는 그 불쾌한 느낌으로 인한 욕지거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사용이 익숙해지기가 무섭게 ‘아 이따위 것 그냥 안 하면 얼마나 편할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오고 난 작년 초부터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와 심리치료를 동시에 진행했다. 뉴질랜드 생활은 아주 좋았는데, 생리 전 증후군이 달을 거듭할수록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10대 때는 생리통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배를 부여잡고 머리를 산발한 채 바닥을 기어 다녔고, 20대 때는 허리 통증과 갑자기 생겨난 배란통에 일을 하면서도 하루 종일 고생하더니, 20대 후반이 되자 고통의 지점은 뇌 깊숙한 곳을 자극했다. 점점 나를 바닥과 구석으로 몰아붙이며 한 달에 한 번씩만 찾아오던 우울은 빠르게 빈도를 높였고, 나는 생리 전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미한 우울증이 생겼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처음엔 생리 전에만 우울했다는 말을 들은 고령의 의사는 첫 상담에서 말했다. 남자가 되고 싶은 적 있었어요? 아니면 남자 형제와 차별받은 적 있나요? 이십 대 중반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까지 나는 내 안의 여성성을 애써 무시하고, 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더욱 남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의 괴리를 가진 여성들의 경우에 생리 전 증후군이 우울로 발전해서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항상 포궁을 미워했다는 걸 떠올렸다. 출산의 의지도 없고 섹스에 대한 욕구도 적은데 할 수만 있다면 들어내고 싶다는 소리를 자주 했다. 한 달에 한 번 엄청난 고통으로 일상이 방해당하고, 호르몬의 농간에 놀아나면서 내 몸을 내가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게 싫었다. 그런 생리가 반가운 건 딱 두 가지 경우였다. 스트레스나 망가진 생활패턴으로 인해 슬슬 아프기만 하고 신경 쓰이게 하다가 결국 터지는 날, 아니면 예상치 못한 임신을 두려워하며 달력을 붙잡고 있던 나에게 안심하라는 듯 찾아오는 날. 이젠 정말 그만 하고 싶었다.


그즈음 접한 새로운 정보는 머리 옆에서 띵! 하며 전구가 켜지는 느낌을 주었다. 5년간 피임을 가능하게 하는 기구인 미레나를 포궁에 삽입하면 부작용으로 생리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 하지만 미레나 시술은 두려움이 컸다. 포궁에 직접 기구를 삽입해야 해서 고통이 따르고, 기구가 자리를 잡는 동안 부정출혈이나 통증, 메스꺼움이 계속될 수 있으며 질염이나 방광염의 부작용도 따를 수 있다고 했다. 임플라논은 3년에 한 번 교체해줘야 하지만, 팔뚝에 삽입하기 때문에 두려움의 장벽이 덜 해서 이거다!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격이 문제였다. 생리과다나 통증 등으로 의사의 처방이 있는 경우에는 보험 적용이 가능하지만, 피임 목적인 경우에는 비보험으로 30만 원 넘는 가격에 시술을 받아야 했다. 나는 생리컵 사용으로 주기도 일정해졌고 통증도 많이 줄어서 피임(을 빙자한 생리중단 부작용) 목적으로만 가능했다. 하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부작용을 믿고 30만 원을 들여 호르몬을 조절했다가 괜히 우울감이 더해진다면 큰일이었다. 나는 잠시 결정을 미뤘다.







어물쩍 어물쩍 영국 체류가 결정됐다. 비자 발급비와 함께 NHS 보험 부담금을 80만 원가량 납부했는데, 처음에는 뭐 때문에 내는지도 몰랐던 이 보험 부담금이 영국 시민들과 동일하게 헬스케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2년 치를 한꺼번에 납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환호했다. 영국은 공공의료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고, 평소에도 어디 아픈 데 없이 잘 버티는 나는 GP를 거의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하에 이 보험을 이용해 임플라논 시술을 받기로 했다. 어차피 없는 셈 치는 비용인데 뭐. 호르몬 변화로 인한 우울감이 오면 같이 진료받을 수 있도록 한국에서 진료의뢰서를 받아와 꾸준히 항우울제를 복용했고, 혹시 모를 심리상담을 위해 Talking therapy가 가능한 근처 병원에 등록까지 마쳐놓았다. 


임플라트는 (여기서는 Implanon, Nexplanon 대신 그냥 Implant라고 한다. 치과로 갈 뻔.) 생리 기간 중에만 시술이 가능하다. 예상 주기에 맞춰 Sex Clinic을 온라인으로 예약하고 아침 10시에 방문했다. 등록을 거친 후, 아주 친절한 선생님을 만나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생리 기간 중 나에게 어떤 증상들이 있는지 등의 간단한 대면 문진을 했다. 이후 선생님은 예상되는 피임 효과와, 어떤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시술 과정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아주 세세하게 알려주셨다. 괜히 떨리는 마음에 생리중단 부작용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고, 생리 전 증후군을 없애고 싶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했다. 100% 보장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술을 받은 여성들은 호르몬 조절로 인해 생리 전 증후군이 줄어들고, 부작용으로 생리중단이 올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답변으로 들었다. 옆에 마련된 진찰대에 누워서 본격적으로 시술이 시작되었고 선생님은 내가 긴장을 할까 봐 계속 나의 영국 생활에 대해 말을 걸고, 시술 순서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시술은 사실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삽입을 할 곳에 부분마취가 되면 약 4cm가량 되는 플라스틱 기구를 밀어 넣는 게 끝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마치 어린아이라도 되는 양, 짠 이거 봐! 아프지도 않지? 여기 만져볼래? 나보다 더 신난 모양이었다. 운이 좋게도 아주 쾌활한 선생님을 만나니 나의 우울감도 날아갈 것 같았다. 


기구가 삽입된 부분에 멍이 들어 3일 정도 조심해야 했지만, 이후부터는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아무 느낌이 없어졌다. 열흘 후 부정출혈이 약 3-5일간 있었는데, 생리컵을 사용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고 생리주기가 끝나가는 때처럼 일반 팬티라이너를 사용했다. 한 달에 두 번이나 피를 보자니 약간 짜증이 났지만, 적응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제발 부작용이 나기를 - 피 없는 다음 주기를 보게 해 주세요 하고 임플라논을 볼 때마다 빌었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 예상 주기. 피는 없었다!


나는 지금 5개월째 생리중단상태이다. 생리대나 탐폰을 살 일도, 생리컵 소독도 할 필요가 없다. 초반에는 우울감이 찾아올 때마다 설마 임플라논 때문일까? 싶었지만 곧 사라지곤 했다. 게다가 항우울제는 점점 복용량을 줄여 지금은 가끔 수면을 도와주는 약만 먹는 중이라 임플라논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식욕 증진이나 체중 증가 등의 다른 부작용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비슷한 증세들이 있긴 했지만 코로나 사태와 맞물려 확실히 임플라논 부작용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생리컵도 편했지만 아예 피를 보는 일이 없다 보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생리 전 증후군이나 배란기의 통증도 없어졌다. 아니, 주기 인식 자체를 못한다. 매 달 단 음식이 당긴다거나 갑자기 식욕이 넘칠 때는 생리 추적 앱을 켜 보면서 아 또 찾아오는구나.. 했지만 이제는 앱을 켤 일도 없다. 그냥 잊고 살고 있다. 


내가 포기해야 하는 시간들이 너무 싫었고 아까웠다. 아파서 운동을 하루 거른다거나, 개인위생처럼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생긴다거나. 언제까지 생리중단 부작용이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회로 나에게 중요한 다른 많은 것에 집중할 시간이 더 확보되었다. 생리중단이든, 더 나아가서는 임신 중단이든, 나의 몸은 나의 의지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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