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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Oct 09. 2018

#MeToo 미투 목소리 얹기

모두가 당당히 소리를 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 이 글은 18년 2월 3일 블로그에 먼저 작성되었습니다.



단언컨대 이 해시태그와 무브먼트에 공감 못하는 여성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여성은 세상의 반을 구성하는 다수이면서 동시에 소수이고 약자로 포지셔닝된다. 뉴스룸을 통해 자신의 큰 결심을 온 나라에 보여준 서지현 검사를 보면, 가방끈이 길고 자신의 일에서 업적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여전히 직장에서는 유리천장에 부딪혀 위로 올라갈 수 없고, 여러 성적 이슈들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 당하며 정신적/신체적 데미지를 입는다. 조선시대도 구한말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서지현 검사의 용기와 결단에 큰 박수를 보내며, 나도 나의 경험을 한번 생각해보고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앞에 가던 아저씨가 라이터를 떨어뜨리면서 옆 건물로 들어가길래 얼른 주워다 가져다줬는데, 아저씨는 받으러 계단을 내려오다가 순간 멈추고는 나에게 올라와 달라고 이야기했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나를 화장실로 이끌었고 거기서 나는 성추행을 당했다. 당시엔 성에 대해 별 지식이 없었고,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 밖에 배우지 못했지만 차마 그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치마를 들추고, 엄마가 예쁜 속옷을 사줘서 좋겠다며 칭찬처럼 들리는 말을 하고, 속옷 위로 내 음부를 만지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세면대 앞에 서서 불룩해진 앞섶을 들추어 정액을 분출하며 되지도 않는 성교육을 해준 개새끼를 잊을 수 없다. 볼일이 다 끝난 후 라이터를 가져다줘서 고맙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나에게 200원을 쥐어주며 집에 가는 길에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고 했다. 돈을 주고받으며 성을 파는 개념은 몰랐지만 뭔가 기분이 너무나도 불쾌했기에 나는 며칠 동안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갖고 다니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어딘가에 버린 것 같다. 내가 초경 전이었고 삽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뱃속에서 장기가 꿈틀거리면 왠지 내가 임신한 게 아닐까 라는 불안함에 떨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 


수많은 명절 중 하루였는지, 아빠 차 뒷좌석에 타고 가는 도중 술 취해 잠든 남자 친척의 손이 슬그머니 내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나중에 엄마나 아빠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데, 당황하면서 친척 아저씨니까 괜찮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무의식 중에 평소에 하던 행동을 아이인 나에게까지 한 건지, 의도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이후부터 그 친척을 볼 때면 그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 남매 또래의 자녀를 둔 아빠 친구네 가족과 교외 여행을 갔었다. 우리를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하고 밖에서 맥주를 마시던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내 오른쪽에서 자던 아빠 친구 아들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내 가슴을 만졌다. 뒤척이며 깨는 척을 해 금방 무마하긴 했지만 그 아이는 계속 시도했다.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말을 걸던 그 아이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또 무마하려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거나, 지금의 좋은 분위기를 나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학교 때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우리를 보며 자위행위를 했던 택시기사 아저씨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때 타고 다니던 버스에서 만난 쩍벌남도 잊지 못한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면 거의 사람이 없는 시외버스였는데, 하고 많은 빈 좌석을 놔두고 굳이 내 옆에 앉아서는 허벅지가 밀착되도록 180도 가까이 쩍벌을 하며 나를 창문가로 몰아넣었던 아저씨. 불쾌하지만 자리를 옮긴다면 도착지까지 20분이나 되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성추행범으로 생각한 나에게 어떠한 위협이 올지 몰라 최대한 떨어지려 창문가에 구겨져 가만히 다른 생각만을 했다. 내리기 전에 뒷문가에 서서 환멸의 눈빛을 보내며 옆 사람 생각해서 다리 좀 오므리라고 말했더니 역시나, 자신을 성추행범으로 생각한다는 듯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대꾸하던 개새끼였다.


대학교 때 광화문에서 집에 가는 막차를 기다리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직장인처럼 보이는 정장 차림이었는데 머뭇머뭇 뭔가를 물으려고 했다. 밤이라 술이 조금 취했거나, 아니면 버스에 대한 것을 물으려는 줄 알았다. 한참을 망설이고 어색한 웃음을 짓던 그는 나에게 “저기.. 지불할 테니까..”라는 말을 했다. 무슨 소린지 몰라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그게 나와 성매매를 하고 싶다는 말인 줄 알고 나서는 “그런 사람 아니다” 라며 그를 돌려보냈다. 그 개새끼는 술도 취하지 않았고 정말 평범하게 보이는 직장인이었고, 나는 긴 청바지와 박시한 티셔츠 차림에 백팩을 멘 대학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성들이 야하게 입어서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일부 남성들이 성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좆같은 개소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치맛단을 줄이거나 가슴골이 파이지 않은 교복을 입어도, 살색이 보이는 곳은 얼굴과 손발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욕을 느끼는 놈들도 있다.


알바를 할 때는 언어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고등학교 때 일한 패스트푸드점에서는 내가 딱 봐도 학생이니 하대하고 다짜고짜 욕을 하다가, 덩치 큰 남자 매니저가 뒤에서 나오면 그제야 입을 닥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학교 때는 대부분 낮에 공부하고 저녁에 알바를 했기 때문에 술 취한 사람들을 많이 상대했는데, 짧은 내 머리와 수더분한 스타일을 보고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상당히 궁금해했고 심지어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 테이블도 봤으며, 한 50대 아저씨는 머리가 그게 뭐냐며 네가 남자냐 여자냐 라며 따지기도 했다. 사장이 남자인 경우에는 상태가 조금 더 심각했다. 너 정도면 학벌도 괜찮고 얼굴도 예쁘니까 2세가 괜찮겠다며 그냥 나랑 살자, 너랑 결혼해야겠다 라고 말하던, 아버지 돈으로 술집을 운영하는 무능력한 사장 새끼가 있었다. 그는 내 퇴근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까지 단골손님과 술을 마시며 나에게 마감을 부탁했고, 그날 당장 그만두려던 나를 시급 인상이라는 순간의 달콤함으로 잡아놓기도 했다.


외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옐로우 피버가 있는 외국인들은 아시아에서 여행 온 키 작은 여자인 나를 굉장히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를 지하철에서부터 계속 쫓아왔다며 현지 번호가 없으면 메일 주소라도 알려달라던 체코 남성, 랭귀지 익스체인지를 하면서 한국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고 술을 마시며 성적인 이야기를 하던 노르웨이 남성, 최근에는 나에게 잘못 온 문자에 답을 해줬는데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행하는 동안 자금을 서포트해줄 부자 남자 친구가 필요하냐고 묻던 뉴질랜드 남성, 지속적으로 문자를 보내면서 내 사진을 계속 보내달라고 이야기하던 프랑스 남성, 한국에 관심 있다고 랭귀지 익스체인지를 하자며 남자 친구에게는 비밀로 하는 short-term relationship을 갖자던 뉴질랜드 남성, 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자기 페니스가 자꾸 발기한다며 만약에 다시 결혼한다면 나와 결혼하겠다는 인도 남성 등. 심지어 이 모든 일들은 내가 특히 아름다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단지 아시안 여성에 대한 성적 페티시가 있는 사람들이고, 내가 대부분의 대화를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피해자인 내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고, 내 분야에서 제대로 된 사회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일적인 불이익은 나열할 것이 별로 없긴 하다. 노안 때문에 어릴 때와 지금 얼굴이 흡사한 탓에 학생으로 보이던 지난 몇 년간 내 분야에서 뭔가를 전문적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의견을 내놓으면, 경험 없는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가볍게 다뤄지는 것을 봐 왔다. 나는 그래도 꽤 오래 이 직업에 관련된 일들을 해 왔고, 전공과 비슷한 길로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남성성을 많이 가진 사람이 유리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 이야기는 아래에 이어서 해야겠다.




지금 잠시 생각해 본 게 이 정도이다. 중간중간 스스로 전에 있었던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라고 치부해 잊힌 기억들을 다 끄집어낸다면 이 글이 대체 어디까지 길어질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경험들이 당시에도 전부 불쾌하고 이상하지만 말할 데가 없었는데, 이젠 입 밖으로 내도 된다는 걸 알았다. 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정했고, 이러한 것들에 맞서 내가 여성이어도 불이익을 받지 않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건 회사를 그만두고 나 자신을 깊게 알아가기 시작하면서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기 위해 어릴 때부터의 삶을 하나씩 꺼내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나는 남성이 사회에서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힘든지를 아주 어릴 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성추행이 있은 이후 열 살부터는 엄마가 매일 아침 골라주는 치마와 구두를 거부하고 왈가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아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들과 더 많이 어울리고, 걸걸한 욕을 쉴 새 없이 입에 올리고, 하굣길에 시비라도 붙으면 당장 책가방을 내동댕이치고 달려가 싸우기 일쑤였다.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적인 성격을 가진 거야, 그래서 그들과 비교했을 때도 지지 않을 수 있어’라고 무의식 중에 나를 세뇌시킨 것 같았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여성 대상 범죄 뉴스들을 보며(그리고 그 일을 생각하며), 남자처럼 하고 다니면 그들은 내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할 테니 나는 타깃에서 벗어나지 않겠느냐며 겁 없이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사실은 내가 남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끊임없이 했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체득한 남성성이 나의 가치관까지 흔드는 순간이었다. 그들과 동등하거나 혹은 약해 보이지 않도록 취미도 여성스러운 건 다 때려치우고 운동을 배웠고, 미디어에 비치는 남성 캐릭터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 술도 많이 마셨고, 담배도 많이 피웠다. 그리고 나는 남성적인 것들이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며 머리를 숏컷(도 모자라 6mm 투블럭)으로 짧게 자르고, 유니섹스이거나 여성성을 부각시키지 않는 옷을 사서 입었다. 억지로 내 안의 여성성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남성성을 덧입혀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이 익숙할 뿐이었다. 여성스럽게 좀 하고 다니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원래 남성적인 성격이야,라고 대꾸하곤 했고 나는 그게 내 본모습인 줄 알고 살았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게 고작 2년 전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경험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이제껏 내가 한 행동들이 다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생각이 많고 약해서 눈물도 많고 여린 사람이기도 하다. 운동을 좋아해서(혹은 좋아하기로 결심해서) 체육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움직이는 걸 매우 귀찮아하기도 한다. 메이크업이나 꽃은 여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서 멀리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엄청난 관심이 있기도 하다. 나는 겉으로 사교적이고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내향인이다. 나도 사실은 나도 예쁜 치마가 입고 싶은 날이 있고(심지어 편하다),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싶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러 보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 여성성을 다시 꺼내고자 노력하는 즉시 나에게 집중될 시선이 싫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잃을 모든 것이 두려웠다. 내가 일하던 곳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우고, 스트레스를 모두가 술 담배로 해소하기 때문에 남성처럼 튼튼한 체력과 털털한 성격이 중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다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그들은 신입인 내가 가진 능력보다는 이런 부수적인 것들을 더 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쯤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졌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주목했다. 나는 강남역 추모현장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추모 열기가 얼마나 대단하고, 이것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여러 페미니즘 책들을 접했다. 이제껏 살아온 나의 인생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얻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충격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불편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어디에도 말할 수 없던 성차별적인 일들이 책 속에 적힌 활자에서 벗어나 나의 생활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비합리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나는 인식하지 못했던 사소한 불평등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차별을 인지하고 불편해할 줄 아는, 그 프로불편러가 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불편함을 알았고 부당함을 알았으니 백그라운드를 단단하게 해서 나도 맞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고, 크게는 내가 남자인 척하고 살지 않아도 여성으로서 살기 불안하거나 불합리한 세상이 아닌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다가 ‘우리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요’라는 대사가 마음에 콱 와서 박혔는데, 아직 나는 밖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아서 사실 소심하게 지켜만 보면서 마음속으로만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 미투 무브먼트(우리나라에서는 ’00_내_성폭력’ 등의 해시태그로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를 알게 됐고, 이렇게 모아진 여성들의 목소리에 나도 데시벨을 더해볼까 한다. 여성이라서 겪는 불이익에 부당하다 말하고, 하고 싶은 건 쟁취하고, 터부시 되거나 제약이 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해내고, 그 행동의 근거를 차근차근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내 행동은 내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 남자는 되는데 여자는 왜 안돼,라고 말하며 이제껏 써 왔던 남성의 가면을 벗어던지는 중인 나에게도 작게나마 칭찬을 해 주면서, 모두가 미투 무브먼트에 목소리를 더해보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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