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서 느끼는 R=VD의 힘
나에게 영국 런던은, 생각한 많은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아주 신기한 곳이다.
고등학생 때 나는 한창 자기 계발서 읽기에 빠져 있었다. <꿈꾸는 다락방>이라는 베스트셀러에서 R=VD라는 (Vivid 생생하게 Dream 꿈꾸면 Realisation 이루어진다)는 개념을 읽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었는데 십 년도 훨씬 지난 지금, 한국도 아닌 영국 땅에서 이 도시에서의 생활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자니 갑자기 그게 머리를 스친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낚시 채널조차 재밌는 고3 여름, 베이징 올림픽이 열렸다. 차라리 시차가 많이 나는 곳에서 올림픽이 열렸다면 수능 점수가 애국심을 이겼을지도 모르겠지만, 1시간 시차 덕분에 대낮의 TV 중계로부터 나를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개막부터 폐막까지 나는 부족한 수능 공부를 단기로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방학 시간을 날렸는데, 마지막쯤 되니 '17일이 그렇게 성적에 큰 영향을 주겠냐' 싶어 폐막식에는 고3의 모습을 지운 채 아주 자리를 잡고 앉아 시청을 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빨간 2층 버스. 4년 후 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에서 준비한 순서였고, 다음은 영국 런던 올림픽이었다. 현재 영국 총리인 보리스 존슨이 당시 런던 시장의 자리에서 올림픽기를 전달받았고, 유명한 음악가들의 등장과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축구공을 차는 장면도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세계지리도 세계사도 관심이 없고 상식도 부족했던 나는 그렇게 영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접했다. 그리고 그냥 생각했다. 런던에 한 번 가보고 싶다.. 고.
그리고 4년 후, 런던 올림픽이 열리는 2012년 나는 런던 한복판에 있었다. 원래 계획은 2011년에 호주 워홀을 가서 돈을 벌고 다음 해 영국을 여행하며 런던 올림픽도 즐기려고 했는데, 인생은 내가 생각한 대로만 쉽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변수가 생겨 호주는 지원조차 할 수 없었고, 덕분에 조금은 특별하게 보냈던 학교 생활에 지쳐 일찍 번아웃과 경미한 우울이 찾아와 집에만 처박혀 있던 나를 불쌍하게 여긴 엄마의 제안으로 등골브레이킹 어학연수를 가게 됐다. 올림픽 기간이 겹쳐 환율은 1,800원대까지 올라가 부담이 컸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학비와 빠듯한 생활비만 들고 날아온 런던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시험 영어에만 익숙해 항상 주눅 들곤 했던 영어 스피킹을 매일 연습할 수 있었고,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해볼 수 있었다. 문화의 중심지에는 볼거리 즐길거리가 끊이질 않았고 'When a man is tired of London, he is tired of life'라는 구절을 절실히 이해했다. 7개월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은, 모래주머니를 떼고 달리기를 하듯 한국에 돌아가면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그리고 어디서든 나는 잘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자존감을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런던에서만 7개월을 지냈지만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친했던 사람들과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하며 언젠가는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이 닳도록 했었다. 교환학생도 알아봤지만 미대 학생들에게만 기회가 열려 있어서 정경대 학생인 나는 짜져 있어야 했다.. 그냥 좋았던 시절을 추억팔이 하며 안줏거리 삼을 꿈으로만 남을 줄 알았는데, 영국과 워킹홀리데이 협정(YMS Scheme)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막연한 꿈에 다다를 수 있는 구름다리가 열렸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잠시 두 발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R=VD가 영향을 미쳤을까? 나는 퇴사 후 이직을 준비하지 않고 방황하다가 서른이 되기 전에 미뤄둔 워홀을 가기로 결심했다. 1000명을 뽑는 영국 랜덤 추첨에 떨어지고 나서 대안으로 뉴질랜드를 다녀온 후, 다시 지원해 합격하고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언젠가는 여기로 돌아와 일도 해보고 싶고, 내가 원하는 공부도 조금씩 해보고 싶었다. 물론 코로나 시국에 중단된 수업들도 많지만.. 여기로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어학연수 시절에는 남서쪽에서 서쪽으로 이사를 한 번 했고, 워홀 초반에는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사를 했다. 남-서-북을 다 돌아다니면서 쉬는 날 사진을 찍으러 나갈 때면 자연스레 익숙하지 않은 동쪽으로 향하며 여기서 한 번쯤은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쪽은 쇼디치, 브릭 레인, 올드 스트릿 곳곳에 예쁜 편집샵이 많고 주중에도 마켓이 선다. 가끔은 홍대 클럽 거리처럼 길바닥에 술병 들고 눈 풀려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지만(그래서인지 현재 센트럴 지역구 중 코로나 확진자가 제일 많음), 젊은이들이 많아 개성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여자 빡빡이는 얌전한 축에 속해서 이상한 눈길을 받을 염려가 없어 좋다. 동쪽은 위험해! 1존 근처는 방값이 비싸! 남들의 기준에서는 걸리는 것이 많았겠지만 나는 약 3주 전 이사한 집에서 아주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런던은 집값이 비싸서, 쉐어하우스에 방을 하나 빌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집도 아니고 남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니, 서로 배려하고 내 집처럼 사용하지 않으면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어찌어찌 살았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고, 역병이 창궐하며 밖으로 나다닐 새가 없으니 다른 지출이 많이 줄어 방값을 조금 더 내고서라도 편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에 혼자 사용하는 스튜디오로 이사를 왔다. 나만 쓸 수 있는 작은 정원에는 식물이 가득하고, 블록 전체가 예술가 작업실이나 갤러리, 카페가 위치해 있어 내가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시간 외에는 소음이 없다. 예술가들 사이에 있으니 나도 으쓱으쓱 뭔가 영감을 받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취미로 사이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워홀 기간 동안 돈을 모아 엄마를 모시고 또 여행을 할 생각이었는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지금 시국에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기보다는 내 한 몸 잘 건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꿈꾸던 평화로운 오전도 이루어졌다. 어학연수 때 구경 차 동쪽의 수많은 마켓 중 하나인 꽃 시장에 들렀는데, 그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꽃 = 여성적이다 라는 젠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다가,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내 안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이제껏 멀리 했던 꽃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며 원데이 클래스도 자주 다니고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꽃시장에 들러 부케를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영국으로 돌아오며 막연한 목표들을 많이 세웠지만 단 한 가지 구체적이었던 것은 '일요일 오전마다 꽃시장에 들르기, 내 공간을 꽃 향기로 채우기'였다. 이제껏은 멀어서 가지 못했지만, 지난주부터 일요일 오전마다 눈이 반짝 떠지는 게 꽃 시장이 바로 5분 거리여서 일까. 친구에게 선물할 선인장도 사고, 가든에 색을 더해줄 국화도 사고, 공간에 향기를 더해줄 유칼립투스와 프리지아 그리고 아름다운 색조합의 장미도 구입했다. 나는 평소에도 식욕이 별로 없고 먹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꽃을 한 아름 사 들고 돌아오는 길 내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다는 몽글몽글한 마음이 들었다.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 나는 그리 간절하거나 절박했던 건 아니라서 흐릿하고 막연하게 그저 꿈만 꾼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상상은 생각보다 생생했음을.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일들의 연속일지도 모르지만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걸 보자니, 좋아하는 것에 마음과 눈길이 가는 걸 막기는 힘들구나 싶다. 상상의 힘을 바탕으로, 오늘 밤도 유칼립투스 향기를 맡으며 또 다른 상상 속에 빠질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