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에세이, 강화100의 그림 산책을 시작하며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이 어찌나 하고 싶은지…
이 시국에 휴양지는 꿈도 못 꾸고 캠핑 사진을 검색하기가 며칠째 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붐비는 곳이 아닌 산 중턱 어딘가라면 오히려 코로나19로부터 더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상상 속에서도 타협을 해본다. 하지만 현실은 보건용 마스크를 쓴 채 인구 과잉의 사무실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상태로 근무한 지 2주 째를 맞았다.
한 팀에서 확진자가 발생할 경우 전체 자가격리로 업무가 마비될 수 있는 만큼 팀 구성원의 50%씩 층을 분리해 근무하게 되었는데, 배치받은 층이 유난히 인구 밀도가 높다. 덕분에 사무실에서 마스크를 쓴 것인지, 마스크 속 사무실에 있는 것이지 모르겠다. 사무실이든, 마스크든 답답하다는 이야기이자 모히또든 몰디브든 떠나고 싶다는 말이다.
떠나고야 말겠다고 쓰고 또 쓰는 버킷리스트야 수첩 한 페이지를 넘기지만, 내겐 꽤나 당당하게 이미 완수한 버킷리스트가 있다. 바로 WCT(West Coast Trail), 그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답답했던 일상이 뻥하고 뚫리는 효과가 있어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다.
WCT는 캐나다 서쪽에 위치한 밴쿠버 섬 서쪽 해안을 걷는 백팩킹 스타일의 트레일이다. 2016년 8월 말부터 9월 초 까지 7일 간 75km의 이 길을 걸었다. 이 해안길은 선박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태평양의 거센 파도가 불어오는 바다와 무수한 식물들, 늪 지역을 지나고 길고 짧은 수많은 사다리를 오르내린다. 세계 10대 백팩킹 코스답게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팀은 셋이었다. 리더는 밴쿠버에 살고 있던 산악인과 자연인 중간 어디 즈음의 중년 남성 C선배,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한 지 1년 미만의 출판사 대표 J언니, 그리고 일단 가기로 했으니 가보자고 나선 나다. 처음부터 셋은 아니었다. 맨 처음 우리 팀은 무려 다섯이었다.
WCT로 출발하기 1년 전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C선배와 제주도에서 뭉친 우리는 제주올레길을 걷고 저녁에 제주막걸리를 마셨다. 제주의 숨겨진 자연과 마을길을 복원해낸 제주올레길에 흠뻑 빠진 우리들에게 C선배는 원시 제주와 닮은 자연 그대로의 섬으로 떠나는 백팩킹을 제안했고 음주 상태의 우리는 환호했다.
섬에서 섬으로 떠나는 도원결의 후 한 달 동안 백팩킹을 책으로 배운 내가 밴쿠버행 항공권을 예약하겠다고 나섰을 때, 평지에서 축지법을 쓰는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올레길을 만든 이유가 산에 오르기 싫어서였다며 산악 스타일의 트레일 참여를 꺼려했다. 가까운 거리도 가급적 택시 이동을 선호하는 친구 해선은 민폐를 끼칠 수 없다며 참여하지 않았다.
WCT로 떠나기 전, J언니와 나는 시간만 나면, 시간을 내서 걷기 시작했다. 세계 10대 트레일에 나서기 전 최소한의 예의랄까. 동시에 나는 함께 떠날 한 명의 또 다른 멤버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백팩킹 초보 둘을 리더가 돌봐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쉽지 않았다. 아니 결국 그때는 찾지 못했다. 추석 연휴를 포함하긴 했으나 2주가량의 휴가를 내고, 200만 원 남짓한 항공료와 트레일 참가 경비를 부담할 수 있고, 각종 캠핑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이 커뮤니티에서 함께 어울릴 사람을 찾는다면 트레일이 아니라, 결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트레일을 마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그때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던 또 다른 멤버를 둘 다 찾았고, 언젠가 함께 떠날 트레일을 모색하고 있다. 그 비결은 바로 이 트레일의 과정에 있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당시엔 결국 우리는 셋이 떠났고 셋이 돌아왔다. 벌써 4년 전에. 처음 WCT에서 돌아왔을 땐 너무 힘들어서 그곳에서의 일들을 떠올리기도 싫었다. 한동안 캠핑은커녕 산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코로나로 인해 누군가를 만나기도 어디로도 떠나기 어려운 이 시기에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니, 왜 난 그 숲을 상상하기만 해도 설레는 걸까?
마스크 속 사무실에서 수영을 하듯 우프 우프 숨을 쉬는 현실에서 그 깊은 숲과 광활한 바다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건 당연한 일일까. 도대체 우리는 어떤 갈급함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건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그러고 보니, 나도 역시 고갱처럼 그리운 무언가에 대한 그림을 계속 그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다. 그림 이야기를. 저녁이 있는 심심한 삶을 맞닥 들이고서야 요절한 천재 화가의 나이를 훌쩍 넘겨 삼십 대 후반에 처음 마주한 것이 그림이었다. 전시회를 자주 찾고 화가들의 평전을, 미술 에세이는 읽어도 내가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림 없는 내 일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림에 감탄하고, 그림을 둘러싼 이야기를 떠드는 수많은 책과 미디어가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실제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일이다. 내 그림 실력이 형편없을지라도.
실제 그림을 그리면서 배우고 느끼는 것이 화려한 수사의 미술 평론 이상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제 내가 그려오고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그리운 것들에 대한 그림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이게 다 코로나 덕분이며, WCT 때문이다. 그림 산책은 때때로 그리운 숲 WCT로 달려갈지도 모르겠다. 그 환상적인 트레일은 이 코로나 시대 마스크 속에서도 가장 떠오르는 곳이니까. 하지만 그림보다 WCT가 더 궁금한 분들에겐 뭐 이런 반전이... WCT가 궁금하신다면 그림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또 만나게 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