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 2호 초상화 그리기
벌써 몇 해 전 널리 읽혔던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라는 칼럼을 아시는가. 서울대 정치학과 김영민 교수는 명절이면 마주하게 되는 상황에 성찰적인 질문을 던져 주변 사람을 긴장시키라고 유쾌하게 알려주었다.
명절 때면 주변 친척 어르신들로 부터 듣기 마련인 ”취업이나 결혼은 언제 할 것이며, 손주는 언제 안겨줄 예정이냐 “같은 오지랖에 대처하는 방법을 철학적 질문으로 응수하라 조언한 것이다.
명절을 무사히 날 수 있는 이토록 절묘하고 신통한 비기를 이제야 알게 되어 무척 기쁜 마음도 잠시, 오히려 긴장 모드가 되었다. 조카 2호로부터 “왜 나의 초상화는 없는 것인가”라는 다소 존재론적 질문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2년 전 이제는 열두 살이 된 조카 1호의 아홉 살 인생을 담은 초상화를 완성했다. 내 첫 번째 본격 인물화이기도 한 이 그림은 주인공의 할머니인 내 모친이 구매한 뒤, 내가 쓰던 지금은 빈 방 한켠에 걸어두셨다.
하지만 명절이나 휴가철 동생 가족들이 방문하게 될 때면 조카 2호가 “왜 누나 그림만 있는 거예요?” 묻거나 “나만 없어. 초상화”라며 섭섭해할지 몰라 이 그림을 숨겨야 했다.
실제로 몇 번이나 장롱 깊은 곳에 몸을 피했다가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곤 했던 <캐러멜 맛 과자를 먹는 아이>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자각하고서야 조카 1호의 초상화와 동일한 캔버스(10F)에 조카 2호와 녀석이 좋아하는 공룡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리는 과정에서 구성에 있어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고 그림은 점점 좋아져 갔다(고 믿는다).
덕분에 그림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 일상에 머물렀고, 앞니가 빠진 시기의 장난스러운 표정과 귀여움이 잔뜩 묻은 녀석, 조카 2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더구나 캐러멜맛 과자를 먹는 아이로 그려진 누나의 초상화보다 2년 남짓 시간이 지난 후에 그려진 그림인 탓에 약간의 경험 증가로 인물 묘사가 조금은 더 좋아졌고, 소재을 더하고 배치하는 구성력도 늘었다고도 자평한다.
좀 더 힙하고 재미있는 구성을 만들어보겠다고, 풍선을 비롯한 온갖 파티용품들을 아이패드에서 그림과 배치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녀석이 좋아하는, 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는 공룡들의 종류와 특징에 대해서도 살펴야 했다. 언젠가 아이가 언급했던 공룡이 좋아하던 종류인지를 되물어가면서 그림을 그려갔다.
그런데 말이다. 그림을 그려갈수록 공룡 친구들과 함께 한 환상적인 요소를 더한 만큼 팝아트처럼 재미를 좀 더 끌어내야 할지, 인물 묘사를 더 세밀하게 해서 정교함을 높여야 할지 고민이 깊어져갔다. 소위 적정 기술, 적정 묘사의 정도를 정해야 하는 중반 이후 작업은 선택의 줄다리기였다.
거기다 밝은 느낌을 주고 싶어서 배경을 민트그린과 바닥은 캐러멜 색 중심의 파스텔로 깔았더니 인물들과 경쟁하는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마무리 단계에서 배경이 되는 그린의 채도를 꽤나 낮추고, 바닥은 아이가 좋아하는 짙은 초콜릿 색에 선명한 방울방울 동그라미로 바꾸었더니 인물이 도드라지는 배경의 마법이 벌어졌다.
아래 앞니 두 개가 빠진 꼬맹이 시절의 자기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을 현서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적어도 이번 추석에는 추석의 본질을 되물을까, 존재론적 고민을 털어놓을까 염려할 필요 없이 모두가 행복하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