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Lacaton Vassal의 그대로 두기
건축과 2학년 시절, 우리는 설계 수업에서 모두 종로구 어딘가의 땅을 정해 그 땅에 어떤 가상의 건물을 설계해야 했다. 나는 수송동 어딘가에 몇 시간을 서성이며, 사진도 찍고 끄적거리기도 했다. 여기에 도대체 뭘 지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임시로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작은 삼각형 모양의 땅이었다. 사람과 건물로 꽉 시내에서, 비록 주차장이라 할지라도 비어 있는 공간은 참 매력적이었다. 몇 번을 방문해도 느낌은 비슷했다. 이곳에 무엇을 짓더라도, 비어 있는 것보다 못할 것만 같았다.
학교 설계실에 모이니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어떤 건물을 설계해야 한다는 건축가의 과제를 맞닥뜨린 우리는,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그 땅에 건물을 짓는 것이 내가 건축과에 온 이유이자 설계 수업을 듣는 이유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꼭 직업의 본질과 사명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게으름이나 아이디어와 영감의 부족을 탓해보기도 했지만, 이러한 우리의 고민이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더 경험 많은 건축가들에게도 절실한 생각이었다는 건 한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짓지 않는 것도 건축가의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 들리는 이 질문에 2021년에 프리츠커 상을 받은 프랑스의 건축가 듀오 라카통 바살 Lacaton Vassal은 명확한 답을 내준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당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어떤 치료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충분히 관찰하고 정확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종종 답이 되기도 합니다"
"When you go to the doctor, they might tell you that you’re fine, that you don’t need any medicine. Architecture should be the same. If you take time to observe, and look very precisely, sometimes the answer is to do nothing.”
의사가 치료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우선 진단을 내리는 전문가라는 것, 또 누구도 과잉 진료는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대로도 좋다'라고 진단을 내리는 것 역시 건축가의 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1996년에 레옹 아우콕 광장 Place Léon Aucoc의 개선사업에서 이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음'이라는 설계안을 제출했다. 40년간이나 연임한 전 시장에 뒤이어 임명된 보르도 Bordeaux 의 새로운 시장은 혁신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고,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대개 그렇듯 일단 무언가를 짓고 싶어 했다. 시에서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도시환경 개선사업 같은 것을 대대적으로 벌이며, 광장 미화 사업에 라카통 바살을 불러들였다. 아마 시에서는 당국의 투자와 의지를 한눈에 보여줄, 새로운 디자인의 벤치나 바닥 포장 같은 성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광장을 처음으로 방문한 두 건축가는 광장이 이미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손댈 곳은 없어 보였다. 광장은 건축적으로 아름다웠고, 주변 환경과도 잘 어울렸으며 무엇보다도 활기차게 잘 쓰이고 있었다. 이미 아름답고 좋은 공간을 보았을 때 건축가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넉 달이 지나 시가 받은 것은 기대했던 새로운 광장의 설계안이 아니라, 광장이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하다는 보고서였다. 넉 달의 작업 기간 동안 두 건축가는 그곳에서 받은 첫인상과,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잘 전달하기 위해 세심하게 광장을 조사했다. 광장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관찰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 광장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새로운 디자인이 아니라 약간의 유지 보수 정도였다. 보고서에는 광장의 자갈을 교체하고, 조금 더 자주 청소하고, 가로수를 돌보는 정도의 간단한 유지작업이 포함되었다. 심지어 낡아서 못 쓰게 된 벤치도 새로운 디자인의 벤치로 교체하지 않고, 시에서 이미 재고를 보유하고 있던 같은 모델의 벤치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보고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광장을 새로 짓는 데 쓰일 사업비가 어떻게 주변 동네에서 나무를 다듬고, 정원의 자갈을 교체하고, 상한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것 등의 정비에 장기간 사용될 수 있는지도 제안했다. 당연하게도 이 보고서에 몹시 당황한 시 공무원들은 계획을 처음에는 거부했다고 한다. 당국은 어쨌든 광장의 모습이 눈에 띄게 달라 보이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설계안은 받아들여졌고, 또 (중요한) 설계비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보고서가 결국은 받아들여지고 또 심지어 설계비도 받았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두 건축가의 선택은 한편 무척 럭셔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에게도 건축가로서 자신을 표현하고, 작업을 쌓아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라카통바살은 설계사무실을 낸 지 10년을 맞이해 조금씩 그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고, 지어진 프로젝트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 당연히 아쉬움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광장을 '있는 그대로 두기'는 어찌 보면 꽤나 비장한 각오나 선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이 둘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어떤 반항이나 건축을 부정하려는 그런 거창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베르사유궁 같은 건축을 보면서 무언가를 바꾸거나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아우콕 광장도 시대와 스케일이 다를 뿐이지, 같은 선택이었다고. 건축가가 좋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이미 좋은 공간을 지키는 것도 건축가의 일인 셈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확립하고 실천한 '우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건축가의 일이며 때로는 짓지 않을 수도 있다'는 태도는 이후로 다른 프로젝트의 방향성에 중요한 바탕이 된다. 부수지 않고 (never demolish), 없애거나 바꾸지 않으며 (never remove or replace) 항상 더하고 (always add), 변화시킨다(transform and revise)는 이들의 태도는, 적은 예산으로 널찍한 생활공간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주거 프로젝트, 현장의 나무와 자연을 그대로 살리는 설계 방식, 또 기존 건물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여러 재생 프로젝트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이 두 건축가는 주거와 문화시설, 교육시설 등 다양한 스케일과 주제의 프로젝트로, 자신들의 접근법이 결코 비주류적이거나 대안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본질적인 태도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Huber, D., 2015. David Huber on Architecture of Lacaton Vassal. Beyond relief.
Lacaton, A., 2003. We don’t believe in Form. Oris, 13.
Lacaton, A. and Vassal, J.-P., 2015. Freedom of Use. Cambridge, MA: Sternberg Press.
Wilson, R., 2013. Not Doing/Overdoing: ‘Omission’ and ‘Excess’ - Lacaton & Vassal’s Place Léon Aucoc, Bordeaux, and Construire’s Le Channel, Scène Nationale de Calais, Calais. Architectural Design, 83 (6), 4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