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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절주절 신씨네Cine Jan 27. 2019

시(詩), 아마도 부끄러울 용기에 관한 성찰

<동주>를 다시 보고

그는 참 적막했다. 무슨 일이든 앞장설 용기는 없었고 오직 네모난 스크린 속 네모난 방에 앉아 외따로 이중 감옥에 스스로를 가뒀다. 그곳에서 그는 눈앞의 단선적 현실을 네모난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아 새 세계를 창조해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캄캄한 시대, 시인 동주(강하늘)는 밤하늘 헤일 수 없는 순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눈을 헹궜다. 그래서 그의 세상은 언제나 희거나 검었다. 그는 얼핏 ‘순수’로 가득 차서 시대와 고립된 곳에 거주하는 듯 보인다. 몽규(박정민)같이 투쟁적이며, 아버지(최홍일)처럼 안위만 위하는 일반적 삶의 시선에서 그는 철부지로 낙인찍힐 뿐이다. 그리고 자신도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며 자조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길래 이다지도 욕될까’(참회록)


오프닝 시퀀스. 일본인 형사(김인우)는 26년 간 동주의 삶을 단 몇 문장으로 나열, 정리해 버린다.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 살이고, 사는 곳은 어디이며, 그간의 행적은 어떠한지... 얼핏 들어도 아름답긴커녕, 운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그 단순한 문장들로 쉽게 정리되는 삶이 부끄럽다는 듯 어두컴컴한 화면에서 동주는 계속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를 반복한다. 그는 무엇이 이리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과거로 돌아가는 영화는 그의 부끄러움과 어렴풋이 느껴지는 강건한 의지를 탐색한다. 


민족을 위해 희생을 다짐한 친구 몽규의 삶에 비해 방구석에 틀어박혀 펜을 쥔 동주의 고요한 삶은 초라하다. 좁은 방에서 바깥을 향한 동주의 시선, 그 끝에 걸린 몽규의 미소.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가겠다"며 떠나가는 몽규를 가만히 바라보는 동주의 눈빛은 곧 용기 없는 자책으로 환원된다.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흰 그림자)

 

이러한 시에 대해 형사는 자의적 의미를 탐구하며, “이런 시를 쉽게 쓴 너”라 시인을 타박한다. 그를 바라보는 동주의 얼굴은 관객들에게 부감으로 짓눌려 전해진다. 시인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형사에게 동주는 차마 화내지 못한다. 사실 그에게 ‘이런 시’는 이념도, 신념도 아니었기에 그렇다. 오직 즐거움이자 도피처였던 시는 다분히 나르시시즘적이다. 자기애에 대해 독립운동의 의미를 욱여넣고 소리치는 형사의 다그침, 억지로 부여된 의미에 시인은 조금은 늙어가고, 또 조금씩 죽어간다.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병원) 시인에게 늙음과 젊음은 양적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늙음은 시의 순수함을 갉아먹으며 자란다. 그래서 ‘쉽게 쓴 시’에서 이념을 탐구하는 형사가 시인의 생명을 조금씩 앗아가는 건 자명하다.


자기애는 투쟁적 시대 배경과 맞물려 부끄러움을 남긴다. 문학을 숨는 도구로 폄하하는 몽규의 세상에서 동주가 추구하는 문학은 ‘별이 아스리 멀 듯’ 가닿을 수 없다. “동주가 시를 사랑하는 만큼 몽규도 세상을 사랑해서 그런 거야” 여진(신윤주)의 성숙한 다그침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 부끄러움은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 정지용(문성근)의 말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건 힘들다”는 핑계로 위안을 얻지만, 이념으로 세상을 품지 못하고 자기애적 연애감정과 문학의 순수성만 바라본다는 동주의 사실은 스스로를 순수한 초라함에 밀어 넣는다. 즐거움과 의무감의 충돌, 까만 세상에서 즐거움은 불합리하게도 금기가 되고 만다.

 

결국 동주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무장 투쟁으로 부끄러움을 타파하려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칼을 쥔 것처럼 불안하고 부자연스럽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걸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쉽게 씌어진 시)라는 동주의 진심처럼, 그의 선언은 자기변명이다. ‘부끄러운 일’이라 자조하면서도 시의 수미쌍관처럼 폐곡선으로 이어질 시인의 삶을 인정하면서 부끄러움과 동행한다. 눈을 감은 그가 편안해 보이는 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아도 될 이상적 삶에 도달한 까닭이다.


영화의 결말, 시집의 제목을 묻는 쿠미에게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 말해준다. 그러나 “시”라는 발음과 동시에 화면에 사진처럼 고정된 모습엔 격랑의 시대, 시인의 아쉬움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이는 시(詩)인지, 시(時)인지, 시(屍)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흘러가는 목소리완 별개로, 그 이미지만큼은 관객의 가슴에 영원히 각인된다. 왠지 그 모습에서 한 가지 질문이 귓가에 들려온다. ‘당신은 부끄러운 삶을 계속할 용기가 있는가?’ 나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시인조차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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