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01의 기억. 배고픔은 만우절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더블린 거리를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바브라와 이야기하다가, 뒤로 가서 힘없이 걸어오는 코넬리아와 이야기하며 걸어가기를 10분여, 나는 문제가 뭔지 깨달았다. 돈이었다. 둘 다 오스트리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코넬리아는 돈 쓰는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코넬리아가 대화에 흥미를 보이는 건, 더블린의 비싼 물가를 이야기할 때였다. 오스트리아에선 이건 얼만데 여기는 얼마고, 하는 걸 보니 확실했다. 대체 그 좋았다던, 바브라는 한 번도 못 가봤다는 파리는 어떻게 갔다 온 건지. 거기 물가는 여기보다 훨씬 비싼데. 거기 길바닥만큼이나 더럽게 비싼데.
그렇게 코넬리아와 이야기하다가, 바브라와 이야기하다가 하며 더블린 캐슬에 도착했고, 우리는 또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기분이 나빠진 코넬리아. 바브라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기다려서 들어갈까, 그냥 갈까를 토론하다 일단 티켓이나 받자고 이야기를 끝냈다.
바브라가 화장실에 간 사이, 코넬리아와 둘이 남게 되어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또 다른 문제를 알 수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코넬리아가 우울해지는 원인은 내가 평소보다도 더 격렬하게 까칠해질 때의 그것과 같았다.
그녀는 배가 고팠다. 감기기운에 끊임없이 기침과 재채기를 해대는 나를 보며 [너 수프 먹어야 돼.] [응. 수프 먹고 싶어. 근데 여기 너무 비싸.] [맞아! 진짜 비싸. 너 지금 치킨 수프 먹어야 해.] [한국 전통음식중에 치킨수프 비슷한 거 있어. 깅셍 알아?] [응. 알아 깅셍. 허브.] [응. 깅셍이랑 다른 동양허브랑, 쌀이랑 닭 안에 넣고 푹 고아서 먹는 요리 있어 우리 나라에. 몸보신에 좋아. 아, 먹고 싶다.] [그래. 넌 수프가 필요해! 우린 널 위해 수프를 찾아야 해!] 바브라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고, 나는 코넬리아를 위해 일부러 나는 감기가 너무 심해 수프를 먹어야겠다며. 아니면 따뜻한 차라도 좋다고. 몸을 덥힐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더블린 성을 나와 무작정 거리로 나갔다. 먹을 걸 생각하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코넬리아가 갑자기 탄성을 지르더니, 무단횡단을 해 내 손을 끌고 뛰어 들어간 곳은 팔라펠 가게였다. [너, 여기 수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응! 있을 수도 있어.] 당연히 수프 따위 없었다. 하지만 한 접시 가득한 중동음식이 7유로밖에 안 한다며 흥분한 코넬리아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는 말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 다행히 그 집의 블렌드 티는 있었기에 한 주전자에 1.5유로밖에 안 하는 따끈한 홍차를 주문해 마셨다.
코니의 변덕에 기분이 나빠지기 직전인 바브라도 브라우니 한조각에 기분이 겨우 좋아진 것 같았고, 입을 꾹 다물고 그날 더블린 날씨만큼이나 우울해있던 코넬리아는 7유로밖에 안하는 음식이 배에 들어가자,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어깨춤을 추며 [이게~~ 7유로라네~~ 콜드샐러드 두개~~ 핫샐러드 두개~~ 오오~~ 갓 튀긴 팔라펠 두개~ 한접시 가아득~ 7유로라네~ 7. 7. 7. 7유로~]라며 정체불명의 자작곡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계산을 하고 이번에는 앞서서 입장티켓을 쥐고 예의 그 정체불명의 7유로 팔라펠송을 부르며 더블린 성으로 향해 걸어가는 코넬리아를 보며 바브라가 내 팔뚝을 붙잡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에게 작게 소리쳤다. [너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마법이라도 부린 거야? 너 재 음식에 뭐라도 탔어? 야 너 그렇게 좋은 거 있음 나도 좀 줘 봐!] [너 재랑 호텔 조식 먹고 니가 배고플 때까지 그냥 계속 아무것도 안 먹고 돌아다녔지?] [니 말은, 코니가 여태껏 우울할 때마다 배고파서 그랬다는 거야?] [응.] [진짜?] [그럼 다른 이론이 있으면 설명해 봐.] [아…]
하지만 코니의 고민을 한번에 두 개나 해결한 건 실수였던 것 같았다. 코니는 갑자기 기분이 너무 좋아진 건지, 더블린 성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것들을 신기해 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보고는,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와. 여기 여자들 초상화는 되게 신기하다. 아주 가슴을 다 드러냈네.] 라며 감탄을 하다가, 한 방에 들어가자 이 방에서 마법이 느껴진다며.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치는걸 보고는 이건 마법의 거울이라며. 여기서 소원을 빌면 이뤄질 거라고. 그리고 우리가 그 산 증인이 될 거라며 나에게 찍히지도 않는 사진을 찍으라고 계속 재촉했다. 이 방 카펫이 녹색이라고. 생명의 색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니 마법의 방이니깐 닥치고 사진이나 찍으라며.
거기다 바브라는 과거에는 사진을 찍을 때 사람이 죽고 나면 시체를 놓고 사진을 찍었다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들로 평소 무서워서 공포영화도 못 보는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둘은 아주 쌍으로 옆에 딱 붙어 하나는 시체 사진 이야기, 하나는 마법 이야기로 나를 괴롭혔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너네 둘 처음에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어. 내가 오스트리아 미친년들한테 제대로 걸렸구나.]
그래도 원래 또라이는 또라이가 알아본다고. 어떻게 죽이 잘 맞은 우리는 더블린 성에서 나와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뭘 할까 고민했다. [너 펍 가봤어?] [아니. 딱히 아는 사람도 없는데 거기서 앉아서 죽치고 있자니 돈도 아깝고 싫어서. 안 가봤어.] [그럼 가자.] [그래. 뭐. 어차피 나 할일 없어.]
두 오스트리아 미친년의 손에 끌려 도착한 펍은 관광객들만 간다는, 바가지가 어마어마하다는 템플바 펍이었다.
원래 기네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일랜드에 온 이상 기네스를 마셔 봐야겠다. 싶어 기네스를 주문했다. 아. 정말. 기네스가 이런 맛이었구나. 맛이 풍부하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구나. 싶었다. 펍에는 가수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우리가 앉은 자리에선 보이지 않는 위치라 가수들을 비치는 TV가 있었는데, 펍에 장식으로 걸어놓은 세잎클로버 만국기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술기운이 약간 오른 우리는 저게 무슨 소용이냐며 그 만국기 하나로도 봄바람맞은 여고생들마냥 낄낄대며 웃었다. 화면에선 얼굴이 보이지 않는 펍의 가수들은 아일랜드 노래들을 연주하다가, 비틀즈의 ‘Here Comes The Sun’을 연주했다. 여행객들로 가득 찬 펍이라 그런 건지, 비오는 날씨에 지쳐서 그런 건지,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술잔을 들고 노래를 따라불렀다.
아. 더블린에 왔구나. 펍에 왔구나. 비록 관광객들만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더블린이구나.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일랜드에 와서 처음 마신 알코올이라 그런지, 날이 추워서 그런건지 계속 소변이 마려웠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또? 너랑 밥시나 똑같아. 맨날 화장실 가네.] [응. 맞아. 나 방광이 작거든.] [너 방금 그 단어 뭐야?] [응? 방광?] [응. 나 그 단어 몰랐어! 새로 배운 단어다! 방광! 방광! 나는 작은 방광을 가지고 있어! 방광! 방광! ] 한국나이로 28살먹은 밥시는 남자가 가득한 펍에서, 새로운 단어를 배웠다며 흥분해서 ‘방광’이라는 단어를 계속 크게 소리쳤다. 참. 재밌는 애다. 기네스 파인트를 한잔 마시자 배가 불러 더 이상 아무것도 마실 수 없었다. 홈스테이 저녁시간에도 늦어서, 내일 다시 보기로 약속을 하고, 나는 홈스테이로 향했다.
홈스테이로 가자 디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훈제 닭가슴살 3조각에 당근, 매쉬드 포테이토. 디와 그녀의 둘째딸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저녁을 먹는데, 기네스를 마셨다고 하자 둘째 딸이 말했다. [나는 그거 안 좋아하는데. 그거 너무 무거워서.] [맞아. 근데 나는 베일리스도 좋아해.] [으. 난 그것도 싫어. 근데 우리 엄마는 좋아해.] [아하. 그렇구나. 디, 미안한데 나 감자는 좀 남길게. 기네스 때문인지 배가 부르네.] [오. 괜찮아. 윤상. 니 빨래는 아직 덜 말라서, 내일 줄게.] [응. 부탁할께. 잘 먹었어. 잘자!]
오랜만에 실컷 수다를 떨어서인지, 아니면 또라이들을 둘이나 만나서인지. 뜨거운 물에서 목욕을 한 마냥 몸이 기분좋게 늘어졌다. 기침을 콜록콜록 하며, 디에게 받은 뜨거운 물에 새로 산 렘십 맥스를 타 마시고 뜬열에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다 어느순간 까맣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