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때가 되면 그리운 첫사랑처럼
지금은 방콕행 비행기 안. 3일 휴가를 앞두고 온갖 미팅과 업무를 미리 해놓느라 점심시간에도 브런치를 할 틈이 없었다. 그나마 이틀만 휴가를 내고 하루는 반차를 쓰겠다는 나를 팀장님이 배려해준 덕분에 오늘은 늦잠을 자다 집밥을 먹고 여유롭게 공항에 왔다.
공항이라는 곳은 언제나 설렌다. 환전소에 가 외국돈을 받아들고 딱히 살건 없어도 포기할 수 없는 면세 찬스를 누린 뒤에, 게이트에 앉아 있을 새도 없이 바로 탑승했다. 칠흙같이 깜깜한 검은 하늘이 안고 가는 밤비행기 안에서 조심조심 도둑고양이마냥 글을 쓰고 있다. 옆에는 이번 여행의 메이트인 엄마가 잠들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참 좋아했다. 초중고 내내 섭섭지 않게 가족 해외여행을 떠났었는데 그 기억이 참 즐거웠었다. 까다로운 남동생은 어린 나이에도 동남아가 더럽다며 싫다는 의사를 확실히 했지만 난 어디든 좋았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외국 땅을 밟는다는 것 자체도 설렜지만(학교도 학원도 안가고) 그곳에서 보고 느끼는 이국적인 것들이 어린 나의 촉수를 자극했다. 특히 열두살에 떠났던 방콕 여행이 그랬다.
수완나폼 공항의 꿉꿉한 냄새, 강렬한 태국말 억양으로 싸우는듯이 이야기하는 사람들, 호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약간 촌스러운듯한 광고까지. 열 두살의 방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여행을 좋아한만큼 여행에 대한 로망도 컸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비야 작가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라는 책 시리즈를 거짓말 안하고 열번을 넘게 읽었다. 티비를 보다가 여행 프로가 나오면 그냥 넘기질 못했고, 대학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만든 적금통장도 '배낭여행적금'이었다. 마치 성인이 되려는 이유가 여행을 가기 위해서인 것처럼 발버둥을 쳤다.
특히 혼자 가는 여행이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 젊은 여성이 혼자 유럽 땅을 누빈다는 것,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의 표상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을 여행에 투영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알바를 뛰어가며 배낭여행비 5백만원을 다 모은 22살의 여름, 나는 드디어 나홀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 배낭여행의 엔딩을 한줄로 요약한다면 글쎄, 완벽한 새드엔딩이랄까. 지금도 여행을 참 좋아하지만 그 여행을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하겠다. 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었다. 스스로를 제대로 파악 못한 나이였다. 5주라는 긴 시간을 그 먼 유럽땅에서 혼자 보낸다는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행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여행이 '나 자신을 더욱 잘 알기 위한 공부'라면 그런 측면에서는 백점짜리 여행이었다. 익숙한 환경, 편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백지의 공간에 놓여지자 본래의 내가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내가 생각보다 외로움을 탄다는 것을, 쉽게 친구를 만들기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고, 한국음식을 못먹은채로 버티는 것은 최대 열흘 정도 가능하며, 스위스 루체른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는 것에는 감흥이 없고, 박물관이나 유적지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까지.
새로운 나와 마주했을 때 굉장히 패배감을 느꼈었다. 내가 기대했던 나는 외국에 혼자 나와서도 아주 즐거워야 했다. 매우 사교적이어서 어디에서든 친구도 잘 사귀고 혼자서 밥 먹는 것을 쑥스러워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것에 적극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진짜 나는 그렇지 않았다. 치열하게 외로웠고 새로운 사람에게 말 걸기도 쉽지 않았고 혼자먹는 밥은 언제나 별로 맛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여행이 힘들었던건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선택한 찐한 실패였고 어떻게 보면 호된 인생수업이었다.
낯선 나를 받아들이느라 정신적 고뇌를 좀 한 것 빼면 그 5주동안의 유럽여행은 즐거운 편이었다. 여행이 그렇다. 당장 가서는 현실인데 돌아오고 나면 그림이 된다.
아직도 가을 출근길에 찬바람으로 코끝이 시큰해져 오면, 프랑크푸르트 반호프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기차를 기다리던 그 아침이 떠오른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리기 시작하면 연보라색 코트를 입고 리젠트 스트리트를 거닐던 12월의 런던이 떠오르고, 봄이 끝날 즈음엔 오사카의 여름빛이 정말 그립다. 10월이 되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 해운대의 밤바람이 고프다.
두고두고 생각나고 때가 되면 그리워지는 첫사랑 같은 공간을 갖고 있다는건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난 금전적 시간적 체력적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또 여행을 떠난다.
이번 여행은 어떤 그림이 될까.
언제쯤 방콕을 그리워하게 될까.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