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피디 Jul 23. 2024

먼 훗날 우리.

나는 옛 연인의 남은 삶을 이토록 응원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보는 영화였다. 몇 년 전 한번 보고, 이번에 또 한 번 봤다. 유독 울고 싶은 날이어서 그랬는지 몇 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깊어져서 그랬는지 영화 초반부터 울컥울컥 하더니 후반부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게 참 다양한 모양이 있다.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금세 꺼져버리는 사랑이 있고,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잔잔하지만 강한 촛불 같은 사랑도 있다. 애초에 불의 속성을 가지지 않은 사랑도 있겠고.


이들의 사랑은 뭐랄까. 남녀의 사랑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있다. 로맨스에 크게 감동받지 않는 내가 이들의 사랑에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 때문일 것이다.

지독하게 힘들었던 청춘.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절절하게 그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시절에 서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절을 버텨낸 남녀에겐 서로의 젊은 날에 대한 연민이 있고, 그 연민은 서로를 남로서 원망할지언정 인간으로서는 절대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샤오샤오는 반지하 방으로 쫓겨난 후 모든 걸 포기하고 게임에 빠진 젠칭을 떠나버리지만,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여전히 사랑을 붙잡을 수 있었다 생각하는 남자와, 어떻게든 사랑은 끝이 났을 거라 생각하는 여자. 눈밭 위에서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은 사랑과 이별이 완전히 별개의 문제임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음을 받아들인다. 좀 더 어른이 된 둘은, 사랑의 시작과는 참 다르게, 관계의 지속은 사랑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젠칭: 그때 네가 안 떠났다면 그 이후에 우리는 달라졌을까?
샤오샤오: 그때 네가 용기 내서 지하철에 올라탔다면 너랑 평생 함께했을 거야.
젠칭: 그때 우리가 안 헤어졌다면?
샤오샤오: 그래도 결국엔 헤어졌을걸.
젠칭: 만약 그때 돈이 많아서 큰 소파가 있는 큰집에 살았다면?
샤오샤오: 네가 끊임없이 바람피웠겠지.
젠칭: 이도 저도 안 따졌으면 결혼하지 않았을까?
샤오샤오: 진작에 이혼했겠지.
젠칭: 네가 끝까지 내 곁에서 견뎠다면?
샤오샤오: 네가 성공 못 했을걸.
젠칭: 애초에 베이징에 안 갔다면?
샤오샤오: 네 바람대로 다 됐다면?
젠칭: 결국 다 가졌겠지.
샤오샤오: 서로만 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끝내 털어놓는 두 사람. 이 장면에서 나는 두 사람이 과거에 제대로 끝내지 못한 이별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사랑은 끝이 났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샤오샤오가 '그래도 널 항상 사랑했고, 어쩌면 내가 널 놓친 거'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마지막으로 젠칭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보여. 그를 다시 만나볼 생각이었다면 샤오샤오는 절대 이 말을 내뱉지 않았을 테니까. 끝난 사랑에 대한 최고로 순수한 굿바이가 아니었을까.

샤오샤오: 젠칭, '아이 미스 유'
젠칭: 나도 보고 싶었어.
샤오샤오: 내 말 뜻은, 내가 널 놓쳤다고.
샤오샤오: 날 사랑하긴 했어?
젠칭: 너는 날 사랑했어?
샤오샤오: 난 늘 널 사랑했어.
(둘은 껴안고 운다)

나를 오열하게 만든 장면.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안아주며 지독하게 힘들었던 청춘의 버팀목이 되어준 옛 연인에게 남은 인생의 행운을 빌어준다. 나는 이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 미워하되 증오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지만 내가 없는 삶을 진심으로 응원해 줄 수 있는. '우리 둘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샤오샤오: 그땐 서둘러 떠났는데 이번엔 제대로 작별인사 하자. 린젠칭, 잘 가.
젠칭: 펑샤오샤오, 잘 지내.
샤오샤오: 하늘에서 별을 따고 바다에서 진주를 캐다 준댔지?
젠칭: 맞아. 곧 그런 사람 만나게 될 거야.
(둘은 마지막으로 허그한다)
젠칭: 우리 둘 다 잘 될 거야.

그리고 내 눈물꼭지 무장해제하게 만든 젠칭의 아버지가 샤오샤오에게 보낸 편지. 두 사람의 사랑과 아픔을 미리 경험해본, 헤어진 아들의 여자친구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아껴주었던 진짜 어른의 말.

인연이란 게 끝까지 잘되면 좋겠지만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쉽지 않지.
좀 더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깨닫게 될 거란다.

한 번은 기차역에서 내가 네 손을 잡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더구나.
그때 깨달았다. 너희 둘이 함께하지 못해도 넌 여전히 우리 가족이란다.
샤오샤오, 밥 잘 챙겨 먹고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렴.


젠칭과 샤오샤오가 이별의 인사를 끝내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자 현재 시점의 두 사람 모습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다. 젠칭이 샤오샤오와의 이야기를 담아 만든 게임에서 '이언이 켈리를 끝내 못 찾으면 세상은 온통 무채색이 되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채색이 사라졌다는 건 이언이 켈리를 찾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게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 하나.

이언은 영원히 켈리를 사랑해


젠칭은 남은 삶 내내 샤오샤오를 사랑할거다. 이전과는 다른 컬러로. 어쩌면 더 진심으로.


두 사람은 서로가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을 베이징의 하늘을 향해 메아리를 울리며 인사한다. 눈물 가득 고인 눈과 웃는 입으로. ' 없이도 잘 살아야 해, 너 없이도 잘 해볼게' 되뇌이며.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절절하게 아프고 결국은 이어지지 못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많다. 젠칭과 샤오샤오가 쭉 만나 지지고 볶고 사는 모습도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겠지만, 청춘의 사랑이 대부분 이별로 끝이 나는 건 그 단절이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평생 동안 더 잊지 못하는 것이겠지. 서로를 어른으로 만들어준 그 인연을.


먹먹하게 아름다운 시절 인연의 이야기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점쟁이가 나보고 '왜 아직 여기 있냐'고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