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연애의 비밀
그와 내가 만난 지 2000일, 그러니까 5년 하고도 반.
좀처럼 오글거리는 이벤트가 없는 우리지만,
스무 번째 백일을 맞는 날엔 꼭 특별한 글을 선물하고 싶었다.
우리가 3천 일이 되는 날엔 뭘 하고 있을까?
사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이렇게 오래 만날 줄은.
이별의 시기를 가늠하고 시작하는 인연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5년을 넘길 거라고는 상상 못했다. 더구나 연애를 시작할 때 난 스물둘, 만으로 아직 스무 살이었다.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은 전무했다. 대학에 들어와 한창 많은 남자들을 소개받고 소위 '썸'을 탄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말 3초에 남자 친구가 안 생기면 영원히 안 생길 수도 있다"는 선배들의 농담 반 진담 반의 충고를 들으면서, 남자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간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당시 내가 활동하고 있던 연합동아리 행사에서 남자 선배 하나를 만나게 됐다. 나는 09학번 그는 06학번이었으니 사실 동아리 활동으로 마주칠 일은 없던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 선배는 칼졸업 후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으니 더군다나 나와는 만날 구석이 없어서, 이름만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말을 섞어본 건 그 행사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 뭔가 묘했다. 말이 되게 잘 통했다. 매너도 좋았다. 그러면서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했다. 나는 오랜만에 계산 같은거, 밀당 같은거 안하고 튕기지도 않았다. 좋았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사귀자', '오늘 1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내가 그의 밀당에 놀아났든, 나 나름대로 그를 어장의 물고기라고 생각했든, 어쨌든 우리는 여러 번 만났고 마음이 통했고 어느샌가 사귀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선배를 대하는 존댓말이 반말이 되고 어느샌가 '오빠'가 아니라 '자기'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게 실감이 났다. 기념일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적당한 날로 1일을 정했던 기억이 난다.
남자 친구와 5년 넘게 만나고 있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의 열에 아홉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만나세요?"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항상 "글쎄요"지만, 나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싶었다.
글쎄.. 우리가 어떻게 오래 만나게 됐을까
아마도 완전 반대에 가까운 성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좋게 말하면 화끈하고 나쁘게 말하면 욱하는 성격인데, 남자 친구는 좋게 말하면 보살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는 성격이다. 또 나는 항상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편이지만 남자 친구는 누가 정해주는 걸 편하게 생각하곤 한다. 약간의 결정장애랄까. 예를 들어, 나는 남자가 데이트 코스를 짜 와서 '오늘은 여길 가고, 이걸 먹고, 이걸 하자'라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게 왠지 기분이 나쁘다. 내 의견이 반영돼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반대로 남자 친구는 자신이 데이트 코스를 정해야 하면 안절부절못한다. 수심 가득한 얼굴이 된다.
반대인 부분이야 나열하자면 수도 없이 많지만, 우리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핵심은 이런 극과 극의 성향을 서로가 좋아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사람의 차분함에서 안정감을 얻고, 이 사람은 나의 리더십에 편안함을 느낀다. 모자란 것은 배우고 그래도 안 되는 건 가끔 의지하면서, 각자의 빈 공간을 서로의 색깔로 채우고 있다. 반대의 색깔이 섞이면서 그라데이션은 점점 아름다워지고, 완전히 새로운 빛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먼 훗날 언젠가에는 같은 빛깔로 서로의 경계를 알아볼 수 없게 되기를.
반대의 색깔이 섞이면서 그라데이션은 점점 아름다워지고...
먼 훗날 언젠가에는 같은 빛깔로 서로의 경계를 알아볼 수 없게 되기를
뭐니 뭐니 해도 오랜 연애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남자 친구의 배려와 인내 덕분이다. 수시로 욱하고 변덕 부리는 B형 여자 친구를 묵묵히 받아주는 건 분명 쉽지 않았을 터. 지금까지의 연애에서 남자 친구는 항상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덕분에 어렸던 나도 많이 어른이 됐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화내거나 가르치는 법 없이 언제나 따뜻한 존댓말로 날 존중해줘서 정말 고맙다.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나의 일에 발 벗고 나서 줘서 고맙다. 내가 밥을 먹을 때 사랑스럽게 바라봐줘서 고맙다. 밤늦게 피곤한데도 항상 날 집에 바래다줘서 고맙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빵을 구워다 줘서, 나의 초보운전에도 짜증내지 않아줘서, 항상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함께 가줘서, 내가 욱하고 짜증을 내도 묵묵히 기다려줘서,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
연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배울만한 점이 많은 사람이 항상 내 곁에서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나도 그에게 좋은 영향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알러뷰.
선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