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목적

가볍게 떠나기를 원하는 내가 무겁게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

by 혜령

최소한의 밑그림에 나만의 색을 입히고 싶었다.

떠나고 싶었던 것은 이방인이라는 공간에서 삼인칭 관찰자적 시점이 되고 싶어서였다. 영화를 보고 명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세상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가지고 떠난다.

신기하게도 읽는 장소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경험을 했던 기억이 옷 대신 책을 선택하게 했다. 정해진 크기의 공간에 몇 주간 필요한 물건을 채우다 보면 언제나 우선순위를 고민하게 된다.

처음엔 먹는 것이 불편해 질까 두려워 밑반찬과 장조림 등의 일용할 양식을 잘 챙겼다. 추위나 더위에 고생하고 나면 몇 장의 시나리오 안에 힘든 장면들이 우의와 코트 등을 챙기게 한다. 그것도 현지에서 사 입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하고 나면 필요할 때 사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얻는다. 기념품 대신 얻는 쇼핑의 기쁨도 함께 한다.


로마의 흙을 묻혀오고 파리의 돌바닥에 닳아서 스페인의 먼지를 안고 오는 여행가방의 바퀴를 닦으며 다시 떠나는 꿈을 꾼다.

결국은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구할 수 있지만 한글로 된 책은 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구경하러 가서 책을 본다는 것이 다소 모순일지 알지만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가끔은 피할 수 없는 감동과 영감을 주는 이국의 밤엔 한글 책이 그립다.

뜨거운 거리를 걷다가 눈이 멀 것 같은 태양을 피해 문호들이 사랑했던 카페에 가면 , 커피 한잔과 그곳의 공기가 의미 있고 사치스러운 영혼의 향연이 된다. 그 장소에서의 독서는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되고 허름한 옷과 엉성한 나의 외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곳곳의 공원과 길가의 벤치와 여행의 밤에 책을 읽으면, 표현할 길 없는 풍만한 기쁨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한참을 읽다 고개를 들어 에펠탑의 반짝임이나 리스본의 햇살이 깜짝 놀랄 만큼 큰 선물이 되어 나타나는 즐거운 경험 누리기만 하면 된다.


혼자 할 수 있는 은밀한 기쁨이 된 독서는 여행지에서의 의미가 되고 영감의 원천이 되며 또 다른 목적이 되었다. 장소에 따라 읽었던 책이 느낌이 달라지고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는 거짓말 같은 경험을 하며 여행가방의 무게는 책 욕심으로 더욱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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