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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빛초록 Aug 16. 2021

1. [난임일기]2018~2019.딩크족이신가요?

신혼, 아이가 꼭 있어야 할까?


2018년 7월, 우리의 행복한 신혼    

                

2018년 7월 7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고 경기도 24평의 전세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식 비용을 치루고 수중에 5천만원 밖에 없던 우리에게 리모델링을 앞둔 아파트의 값싼 전세집은 굉장히 감사한 일이었다.

저층이었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우리에게 사계절의 행복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봄이 찾아올때면 여린 연두빛의 새순이 올라와 추운 겨울의 끝을 알리며 따스한 희망을 전했고,

여름이면 진하고 울창한 잎들이 한 가득해 나무가 가진 생명력이 얼마나 강인한지 느끼게끔 했다.

가을에 접어들면 매일 조금씩 변해가는 나뭇잎의 색에 계절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 은행잎으로 물들때면 우리 집이 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둘러진 듯해 행복했다.

(때론 그 노란 은행잎이 매일 진짜 금으로 변했으면 좋겠다는 우스운 자본주의적 생각을 했었다.)

겨울철엔 앙상한 나뭇가지가 조금 짠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눈이 오는 날이면 가지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꽃이 황홀했다.

아침에 떠오른 햇살이 나뭇가지 위 눈꽃에 부딪혀 부서질때면, 그 반짝임을 음미하며 커피를 한 잔 하곤 했다.



2018년 7월, 가자! 유럽으로!

스위스, 이탈리아로의 신혼여행


결혼식 2주 후에, 우리는 스위스와 이탈리아로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지난 2015년 혼자 다녀온 유럽여행에서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파리,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꼭 나중에 남편이 될 사람과 신혼여행을 떠나리라 다짐했었다.

스위스의 푸른 자연과 이탈리아의 음식과 흥겨움, 예술과 낭만으로 가득한 프랑스 파리,

두브로브니크의 보랏빛 노을 및에 펼쳐진 파란 바다를 함께하고 싶었다.

연애시절 함께 다녀온 싱가폴 이후로 남편에게는 두번째 해외여행이었고, 유럽으로 나가는 특별한 첫 여행이었다. 모든 인생을 철저히 계획하며 살아가는 나는 이번 여행에 '남편에게 최고의 유럽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며 긴장감 반 자신감 반으로 준비했다.

결혼준비와 회사생활에 지쳐있다가 긴 비행을 하고 처음부터 힘든 일정을 소화하기엔 무리였기에

비교적 자연 안에서 쉴 수 있는 스위스에서 많이 걸어야하는 이탈리아로 일정을 계획했다.

           스위스(인터라켄 → 아델보덴) → 이탈리아(베네치아 → 피렌체 → 로마)

인터라켄에서는 산악 열차를 타고 쉴트호른에 올라 007 촬영지도 보고(날씨가 안좋아 장엄한 설산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ㅠㅠ)

전망대에서 하는 요들송 공연을 즐기며 한국 관광객 답게 신라면에 초콜렛도 먹었다. 피르스트에서는 2시간여 트래킹을 하고 하늘과 호수가 맞닿은 듯한 곳에서 기념사진도 남기고, 짚라인과 페달없는 자전거도 탔다. (이 경험 이후 우리는 짚라인 마니아가 되어 첫번째 결혼기념일엔 심지어 짚라인을 타는게 가장 큰 이벤트 중에 하나였다.)

비싼 물가에 외식은 왠말이냐며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라끌렛 치즈를 사다가 직접 라끌렛과 퐁듀도 해먹고, 간단히 소스와 파스타 면을 사서 라면포트에 원팬 파스타를 해먹으며 매일 밤 와인에 취해 행복해했다. 석회질로 에메랄드 빛을 띄는 물을 보며 마을 산책도 하고, 이국적인 풍광속에 우리를 풍덩 던져 푸욱 적셨다. 아델보덴으로 이동해서는, 처음 가보는 5성급 호텔에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했다.

인터넷으로만 보던 푸르른 알프스산맥과 정상의 설산을 바라보며 온수풀에 몸을 담그고, 아침이면 참새들과 함께 조식을 먹었다. 치즈와 빵이 지상 최고의 음식이라 생각하는 우리남편은 아무래도 한국사람이 아닌 듯 정말 원 없이 치즈와 빵을 즐겼다.

저녁이면 호텔 방 창가에 앉아 깨끗한 스위스의 공기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치즈에 과일을 곁들여 달콤한 와인을 마시고

리듬이 풍부한 재즈를 들으며 사랑이 넘치는 촉촉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꿈만같이 행복했다.

내가 정말 좋은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꿈꿨던 것 처럼 남편과 함께 스위스에 와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꿈만같이 행복했다.이게 정말 꿈일까봐,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취리히 공항에서 베네치아로 이동했다. 깨끗하고 시원한 스위스에서 8월 한 더위의 이탈리아로 이동했는데, 심지어 사람까지 바글바글 많아서 베네치아는 사실 좀 힘들었다. 수상버스를 탈 때면 앉을자리 없이 끈적한 무더위와 친해지고 외국인들의 퀘퀘한 암내에 코를 마비시켜야만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밤마다 울려퍼지는 클래식 공연들은 우리가 왜 베네치아에 와야 했는지, 충분한 이유를 선물해줬다. 그 네모난 광장의 노을과 노란 불빛 속에 들려오는 곡들에 맞춰 우리는 손을잡고 리듬을 탔다.

그 순간 세상과 우리는 철저히 분리되었다. 우리 둘만의 세상이었다.

기차를 타고 피렌체에 가자마자, 신랑은 '내가 바라던 곳이야!' 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거리 곳곳에 70~80% Sale이 붙은 'summer sale'기간이었다. 본인 물건은 겨우 벨트 하나 샀으면서 구경하려고 어딜 들어가든 내 옷과 가방을 골라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도 우리 신랑은 '남자옷은 다 똑같이 못생겨서 재미없어, 나는 자기 옷 골라주는게 제일 좋아. 입으면 예쁘잖아.' 라고 옷을 골라주며 '최고의 영업사원'이 된다. (진짜 점원이 붙을 필요가 없을정도로 구매력을 높여준다.)

처음으로 피렌체 아울렛에 명품관에 가서 가족들 선물 포함 프라다 가방도 5개나 사고 구찌에서 스카프도 5개나 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많은 돈을 쓴 날 중에 하나라 손이 덜덜 떨렸는데, 신랑은 이게 싼거라며 아무렇지 않아했다.

피렌체의 주황빛 벽돌 건물길을 손잡고 나란히 걸으며 스냅 사진도 찍었다. 베끼오 다리에서 노을질 때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으면서도 찍고, 두오모 성당의 돔이 보이는 곳에서도 찍고, 황홀한 야경이 가득한 미켈란젤로 광장에서도, 냉정과 열정사이 주인공들이 나온 거리에서도 찍었다. 한더위에 포즈를 취하고, 3시간여 걸으며 이동한 동선이었지만 이 낭만적인 도시에서 우리가 함께한 날의 사진들을 남기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로마에서는 온갖 유적지들을 돌아보았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화덕피자도 먹었다. 앉아서 먹으면 2유로나 더 추가된다고 힘들게 포장해와서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바보같은 일이었다. 해봐야 5천원인데 굽자마자가 가장 맛있는 화덕피자를 현지 분위기를 가득가득 느끼며 먹었어야 했다. 언젠간 둘이 함께 다시 가서 사치스럽게 피자집에 앉아 생맥주도 한 잔 시키고 거나하게 취해 먹고싶다.

무늬만 천주교인 우리 신랑을 위해 '바티칸투어'도 예약해서 다녀왔다.

경이로운 성 베드로 성당에서의 우리 신랑의 경건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진짜 베드로 성당에 왔다.'라는 감격가득한 눈빛이었다.




2019년 2월, 베트남 뙤약볕아래의 휴양

우리의 세번째 해외여행


우리회사는 겨울이면 힘들어진다. 아니 사실 추석 전부터 힘들다. 9월부터 긴장을 하고 있어야한다.

그래서 가끔 너무 힘에 부칠때면 사람들은 태국, 베트남 같이 따뜻한 나라에서 노곤노곤하게 몸을 풀고 오곤 한다.

처음으로 휴양지 여행을 계획했다. 베트남 호이안의 5성급 리조트은 무려 조식포함 15만원이 안되는 가격에 우리를 완벽히 대접했다.

쏴아-철썩 하는 파도 소리가 어딜 가도 울려퍼지는 리조트 안에서 우리는 수영도 하고, 조식도 먹고, 한국 외식 물가보다도 저렴한 룸서비스를 시켜먹는 사치도 부렸다. 수영장에 사람도 없어서 우리가 가져갔던 대형 튜브를 띄워놓고 물안경을 낀 채로 신이나게 노를 저어 다니는 동영상은 지금봐도 웃음이 난다. 신랑이 동글동글한 몸으로 빠르게 팔로 노를 젓는데, 어찌나 빠른지 모터가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역시 베트남 답게 음식도 완벽했다. 리조트의 룸서비스와 조식은 당연히 맛있고, 현지에 나가서 사먹는 쌀국수와 반미, 볶음면, 만두, 새우구이, 모든것이 입에 완벽히 맞았다. 진한 맛의 에그커피와 콩카페 코코넛커피스무디도 무더위에 지친 몸을 시원하게 쉬게해줬다. 



둘이서도 너무 좋아, 아이가 꼭 있어야할까?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탈리아의 여운을 잊지 못하고 매주 2번은 재즈를 틀어놓고 홈메이드 파스타와 와인을 먹었다. 기분 좋게 취해서 손을잡고 거실에서 춤도 췄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집에 와서 신랑 얼굴을 보자마자 다 날아갔고,

우리는 완벽하게 행복했다.

집안일을 누가 더 하느냐, 하는 모두가 하는 유치한 싸움을 제외하고서는 다툴일도 없었다.

서로가 배려했고, 서로가 이해했으며, 믿어주고, 사랑했다.

아이가 필요없다고 느꼈다.

아니, 사실 아이는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우리가 이렇게 함께 여유롭게 밥을 해먹고, 춤을추고, 주말이면 근교로 놀러를 가는 생활은 없을 거라며.

또 여자의 몸은 아이를 낳고나면 머리도 빠지고, 배는 더 나오고, 살도 찌고, 가슴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추욱 늘어지며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는 까맣게 물들어 잘 빠지지 않는다고 하기에, 그런 못생긴 모습을 남편이 본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아이는, 나에게는 그렇게 있어서는 안될 존재에 가까웠다.육아휴직도 두려웠다. 그 당시 교대근무를 마치고 일근에 나와서 이미지 쇄신을 하기 위해 매번 야근을 자진해서 할 떄 였다. 아이가 생긴다면 '열심히 하는 여직원'이라는 칭호를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다. 아이가 아프면 '아이가 아파서요...'라고 눈치를 보며 휴가를 써야하는 내 모습을 그리는게 너무 싫었다. 회사를 끔찍히도 싫어하면서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입사한 결과물이자 트로피같은 그 직함을 더 높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출산을 하기 위해 일을 배우다가 멈춘다면, 그 사이에 남자 동료들은 앞으로 치고 나갈 것만 같았고, 나는 뒤쳐져서 '애가 더 중요한 똑같은 여직원들'의 바운더리 안에 묶이게 될 것이 싫었다.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왜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같다.

아이가 있어도, 여유는 없지만 함께 밥을 먹는 것은 똑같았을 것이다. 물론 몇년은 서로 아이를 맡으며 밥을 마시겠지만,

조금만 참고 인내하면 아이가 있어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니 사실 그 조금만 참고 인내한다는 생각 자체를

이기적이게도 하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살고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주말 근교 나들이는 아이가 크면 천천히 함께 나갈 수 있다. 둘이서는 매번 비슷했던 풍광들이 아이와 함께한다면 모든게 새로워 보일 수도 있다. 모든게 처음인 아이가 신기해하는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함께 추억을 쌓아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행복해지리라- 는 생각을

그 때는 하지 못했다.

물론 아이를 낳으면 내 몸은 못생기게 변할 것이다. 하지만 운동을 하면된다. 아니, 꼭 운동으로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모든 엄마들은 그 자체로도 빛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 떈 알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신랑은 내가 좀 못생겨진다고 나를 사랑하지 않을 그런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다.

육아휴직도 두려워 할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일을 오래도록 하고 싶다며 사기업이 아닌 공기업만 준비하고 입사했으면서,

왜 그걸 두려워 했는지 의문이다. 일이야 언제든 배울 수 있고, 별 것도 아니다. 그냥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단히 회사일에 욕심을 낼 필요도 없는데 뭘 그리 대단한걸 해보겠다고, 욕심을 냈었다.

그저 회사는 월급 받아 우리 가족 입에 맛있는 음식 하나 더 들어가는 행복을 맛보기 위해 다녀야 하는 곳인데, 그 사실을 그 땐 깨닫지 못했다.

'애가 더 중요한 똑같은 여직원들'의 바운더리에 끼는것은 또 뭐 그리 문제란 말인가.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건강한 아이를 키워내는 것은 그 어떤 회사일을 하는 것보다도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다.가정에 충실하며 적당히 할 일을 해내는 것이야 말로 내가 지향해야하는 일이었다.

그 때의 나는 '나 자신'이 너무도 중요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를 가지고 몸이 망가지고 내 시간과 체력을 빼앗기는 것이 지독히도 싫었다.

몇 년 새 그 이기심은 가라앉고, 많은 걸 희생할 준비가 되었으니 나와 신랑을 닮은 아이가 낳고싶어졌다.

무엇보다도, 우리 신랑이 너무도 많이 좋은 사람이었기에, 나보다도 신랑을 닮은 아이가 낳고싶어졌다.

이 차분하고, 온화하고, 다정하고, 자상한 성품의 사람의 아이를 낳고싶어졌다.

너무도 간절해지고 말았다.

아이를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이, 매일 아이와 함께한다면... 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상상하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신랑과 둘이 밥을 먹을때도, 옆에 아기의자 위에 아이가 앉아서 밥을 함께 먹는 걸 상상하고, 먹여주는걸 상상하고, 때로는 다른 아이들처럼 밥그릇을 신나게 엎고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꺄르르 신나게 웃는것도 상상했다. 아직 말도 못하고 목도 잘 못가누는 아이 앞에서 엄마아빠가 재롱을 떨며 춤을 추고 노래부르며 웃기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상상했고, 신랑과 둘이 사진을 찍을때면 중간에 환하게 웃는 아이가 앉아있는 상상을 했다.

밤에 잠을 잘 때면, 우리 둘 사이를 굳이 비집고 들어와 '엄마 아빠랑 같이잘끄야!'라고 '여기서 안재워주면 한발자국도 여기서 나가지 않겠다.'라고 단호한 얼굴과 말투로 으름장을 놓는 우리를 닮은 아이를 안아주며 재워주는 상상을 했다. 갓난아기때 밤마다 배고프다며 우는 아이를 달래러 나가고, 남편은 출근해야하니 다른 방에서 재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크고 나면 함께 둘러 앉아서 도란도란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아이는 또 그걸 따라하고, 예쁜 공주옷이든 아이언맨 옷이든 사입혀야겠다고 생각했고, 조금 더 크고 나면 함께 앉아서 같은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상상했다. 진작에, 내가 조금 덜 이기적이어서, 나 자신을 조금 덜 소중히 여겨서, 희생을 감내하리라는 각오를 좀 더 빨리 했더라면 우리에게 임신이란 그리 힘들지 않은 일일 수 있었을까.

왜 그런 이기적이고 바보같은 생각을 했었단 말인가.

하고 후회한다.

이 후회를 멈출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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