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두빛초록 Dec 27. 2021

27.[난임일기]불확실성의 파도 위에서

시험관1차 과정 중의 마음들

살아간다는 것은, 불확실성의 파도위에 올라타 있는 것.

때로는 세찬 파도가 몰려와 이겨내지 못하고 바닷속에 가라앉게 되고,

때로는 잔잔해진 파도 위에서 여유로이 달콤한 칵테일 한잔과 음악감상의 여유를 갖는 것.


언제나 불확실한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삶을 살아내왔다.

보이지 않는 앞날에,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 위해서 초등학교때부터 대학생때까지 16년을 꼬박 열심히 공부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력저하로 삶이 너무 고되지 않도록 열심히 운동했다.

어떻게든 나의 노력으로, 불확실성의 파도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긴장을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리듬을 탔다.

졸업, 취업, 결혼을 통해 이제야 간신히 서퍼보드 위에서 적당히 리듬을타며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웠는데

'난임'이라는 크나 큰 파도가 21년, 나를 집어삼켰다.


'난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의 어떠한 노력으로 쉽사리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음식을 챙겨먹고, 밤 10시 이전에 취침하며, 커피와 밀가루, 술을 멀리하고,

중강도 이상의 운동을 주 3-4회 정도 실시하는 습관을 길들인다면 건강이 좋아져 성공할 확률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생식세포 질'이 위의 노력으로 개선이 가능하다면,

배아의 안정적인 '자궁 내 착상'은 신의 영역이라 했던가,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때로는 '원인불명의 난임'이라는 진단서를 받아들게 되는 때도 있다.

현대의학의 어마어마한 발전으로 인공적으로 수정란을 만들 순 있지만, 아직까지 착상을 100%시킬 수 있는 기술은 없다.

실패가 반복되었을 떄 해볼 수 있는 것은 고작 양의학에서의 반착검사(피검사를 통한 호르몬수치 등 추적)와

한의학에서의 임신준비에 좋다는 착상탕을 마시면서 몸의 순환을 돕고 따뜻하게 유지해주는 것 뿐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타이밍으로 맞아서 자연임신에 성공한 사람들은 영영 알수없는,

그 힘든 고난의 과정들을 난임부부는 온 몸으로 겪어내야만한다.

난자 채취 10일전부터 하루 2~3번씩의 자가주사와 약쟁이가 된 듯한 셀 수 없는 알약들을 시간맞춰 몸에 넣어주어야한다.

수면 마취를 한 채 가느다란 바늘을 난소에 찔러넣어 난포내에 자란 난자들을 뽑아내고,

난소가 가득 부어 복수가 찬 채로 몇일을 누워 쉬어야한다.

이식 전 후로도 질정과 주사제, 알약을 시간 맞춰 넣느라 핸드폰 알람이 울리면 모든 활동을 중지해야한다.

여기까지는 신체적인 어려움으로, 사실 아픈 순간 잠시만 넘기면 잊혀지기에 이겨낼만 하다.


본게임은 바로 정신적인 고통이다.

시험관시술 과정에서 여자의 몸은 온갖 호르몬으로 얻어맞아 많이 망가진다.

그럼에도, 난임부부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길, 시험관 시작 전에는 몸보다 멘탈케어에 더 신경써야한다고 할 만큼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이겨내기 힘들다.


과배란주사를 맞는동안은 3-4일에 한번씩 병원에가서 난포(난자)가 몇개 자라고 있는지 초음파를 보게된다.

갈 때 마다 갯수와 크기, 성숙도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보통은 10~15개를 가장 이상적인 갯수로 보기 때문에

충분한 갯수의 난자가 자라고 있는지, 또는 너무 많이 자라서 과자극증후군이 일어나진 않을런지 마음을 졸인다.

난자 채취를 하는 날 오후에는 인공수정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 다음날에 수정란 갯수가 결정된다.

수정란의 갯수와 질은 시험관시술 과정 중에 가장 중요하다.

충분히 많은 수정란이 확보되어야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난자채취를 반복적으로 하지 않고도 이식을 몇번 더 시도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채취하고 누워있는 동안에는 과연 몇개의 수정란이 살아줄지, 또 다시 긴장의 연속이다.

3~5일 후에는 냉동배아 갯수를 알려준다. 아무리 많은 수정란이 생성되어도 냉동시킬 수 있을 정도의 질이 나오지 않으면

어렵사리 채취한 생식세포를 그대로 잃어버려야 하기 때문에, 냉동배아 갯수가 많은 사람들은 시험관 시술을 받는 사람들 틈에서

'배아부자'라고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그만큼 또 다시 마음을 졸여야한다.

이식 이후에는 10일간 기다렸다가 1차 피검사를 한다. 그 10일이 가장 힘들다.

착상을 잘 했을지, 아니면 실패했을지, 수없이 많은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하면서 매직아이 보듯이 눈이 빠지게 몇일을 들여다 본다.

피검사 당일까지 도무지 진해지지 않는 무심한 임신선을 바라보며 매일같이 좌절하곤 한다.

괜찮을거야. 착상이 조금 늦었을뿐이야. 잘 될거야. 하고 되뇌며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한구석에서는 불안함과 걱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와 우울의 우물에 묻혀 잠식된다.

기대와 다른 검사결과지를 받아들고서는, 멍하니 있다가 갑작스레 눈물이난다.

마치 이미 아이를 만났다가 잃어버린양 갑자기 서러움의 눈물이 왈칵 터져나온다.

하지만 오래도록 슬퍼할 수는 없다.

그다음 턴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시 준비해야한다.

또 다시 한번, 희망을 가지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좋은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 일찍 잠들기를 실천해야한다.

우울하다고 축 쳐져있을 시간이 없다.(다행일지도 모른다.)


지난 한달간의 시험관 1차 과정을 되돌아보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았나보다.

몇일간 주사를 맞지 않아보니, 자가주사를 놓는 동안 생각보다 많이 긴장했었던게 느껴졌다.

말랑한 뱃살 덕에 크게 아프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본인 배에 따가운 바늘을 꽂아넣는게 어디 쉬운일이겠는가.


그리고, 외로웠다.

아프고 힘들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내 몸상태는 결국 나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어지러운지, 얼마나 배가 부어서 움직이는게 힘든지, 밤마다 잠이 안와서 뒤척이느라 하루종일 멍한 상태로

회사에 출근하고 반차를 내고 멀리 병원을 오가는 일이 참을만은 하지만 쉽지않았다.

눈에 보이는 아픔이 아니기에 누군가의 눈에는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질질끌며 걷는 내가 꾀병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말에도 외롭고 아팠다.

'마음을 비워야 생긴다.' , '누구도 시험관 하다 안됐는데 2년있다가 자연임신해서 예쁜 아기 낳았다더라.'

'나는 이번에 둘째가 생겼는데, 딸이 아니라서 아쉽다.', '애 낳아봐라. 얼마나 힘든지. 뱃속에 있을때가 천국이다.'

'도대체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왜 낳으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와 같은 말화살이 심장에 날아와서 깊게 박혀 아렸다.

'괜찮아.'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들을 들었을땐 정말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당장에 조용히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놈의 사회생활이 뭔지, 안그래도 서러운데 맘속에 있는 화를 꾹꾹 눌러야했다. 힘들었다.

그냥 별 뜻 없이 으레 스치듯 던진 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처를 받는 나 자신이 속좁은 밴댕이가 된 것만 같아

그것도 속상했다.


병원을 갈 떄 마다 원무과에서 호쾌하게 일시불로 긁은 병원비도 마음에 걸렸다.

많게는 30~50만원씩도 내야 하니, 겨우 3만원도 안되는 티셔츠 한장을 두고서 몇달을 살까말까 고민하는 내가

이렇게 많은 돈을 병원비로 써야한다는 사실에 속상했다.

그나마도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부담은 두배로 늘어나니, 지원기준을 자꾸만 체크하게된다.

한달간 쓴 가계부에 어느때보다도 많이 찍힌 '병원비'항목이 야속하기만 했다.

분명히 우리는 천만원 한도에선 신경쓰지 않기로 정해두었지만,

소비에는 영 재능이 없는 나로서는 신경이 자꾸만 쓰인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불확실한 기다림'이었다.

성격이 급해서 1주일의 할일목록을 작성해두곤 2-3일만에 다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내게,

시험관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 했다. 자꾸만 기다리라고 했다.

매 검사마다 결과는 또 얼마나 늦게 나오는지, 초조한 마음 탓에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다.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늘었고, 난임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을까 싶어 자꾸만 새로고침을 했다.

누군가 '이렇게 될것이 확실하다.'라고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와 같은 상황인 사람들의 글을 찾아 읽고,

나의 경우는 예후가 어떨 것 같은지 물어보는 글을 올렸다. 몇개 달리지 않는 댓글에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온 신경이 쏠려 있으니 집안일에도, 회사일에도 조금씩 소홀해져갔다.

매일 몇번씩 '정신차려야지!'라고 일에 집중했다가도, 이내 내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그런 나에게 의지박약이라며 실망하기를 몇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글로 풀어내고나면, 마음의 해소감이 찾아온다.

글쓰기가 없었더라면 나는 올해 겪은 이 모든 과정을 굳건히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힘들었던 일들과 마음들을 활자로 토해낸다. 그러면 버틸 수 있다.


다시금 마음을 먹는다.

다 잘될 것이다.


앞으로는 매일같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신랑과 손을 잡고 왈츠를 추듯 춤을 추며

조금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렇게 행복의 빛을 반짝이며 살다보면, 새로운 행복이 오는 길에 우리를 쉽게 찾아서 얼른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행복을 온 힘을 다해 정성으로 맞이해야지.

그리고 함께 또 다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6.[난임일기]입원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