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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빛초록 Mar 21. 2022

꽃비가 내리던 봄날을 기억해요

90년대 봄 이야기

때는 바야흐로 3월.

아침 뉴스를 보고 나서는 아빠의 출근길 하늘이 조금씩 환해질 무렵이면

바람은 봄향기를 가득 싣고 몸과 마음을 새로이 청소하듯 불어왔다.


겨울내 행여 추운 칼바람이 아빠의 몸 안으로 파고들새라 엄마는 두꺼운 목도리를 아빠의 코트자락 안쪽까지 꼭꼭 여미어 동여매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얇은 목도리로 바뀌는 날엔 드디어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기나긴 겨울방학이 끝나는 개학날, 학교로 향하는 경쾌한 발걸음엔 봄노래가 흘렀다.

밤새 차분히 가라앉았다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듯 움직이는 청량한 아침공기가 코 끝을 간질이는게 좋아 나는 한 껏 아침공기를 들이마셨다.


'새 생명이 피어나는 봄'이 가장 좋은 이유는 바로 꽃들이 활짝 피어나기 때문이었다.

꽃샘추위가 한창일 때 가장 먼저 피어나는 노란 산수유 꽃 나무가 봄을 알리고 나면,

곧이어 나뭇가지들엔 연한 연두빛의 새순이 돋아났다.

노란 빛이 섞여있는 듯 참으로 연한 초록빛이었다. 

일년 중 그 때만 잠시 만날 수 있는 그 연두빛초록을 나는 참으로 사랑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피어낸 가장 위대한 생명력이자, 때묻지 않은 어린 새순이었다.

그 새순이 점점 더 진한 초록빛이 되다 꽃을 피우고, 여름엔 짙은 녹음을 울창하게 이루는 과정을 사랑했다.


3월 중순이 넘으면 노오란 개나리가 화사하게 피어났다. 등교길 양쪽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개나리는 언제나 내게 

'밤 새 단꿈을 꾸며 잘 잤는지, 오늘 하루도 친구들과 즐겁게 놀길.'이라고 안부를 전했다.


4월이 되면 연분홍색의 벚꽃 꽃망울이 터져나왔다.

마치 엄마가 전자렌지에 튀겨주는 팝콘같이 생겨, 나는 나무에 팝콘이 열린다고 좋아했다.

우리동네는 오래되어 커다란 벚꽃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선 벚꽃터널길이 있었다.

근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혔기에 주변 동네 사람들도 봄소풍을 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 아름다운 동네에 산다는 것이 참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단지 내에서 가장 큰 벚꽃나무가 우리집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주방 창문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벚꽃나무는 바람이 불 때 마다 여리여리한 분홍꽃잎을 흩날리곤 했다.

엄마가 부엌에서 향긋한 봄나물을 요리할 때면 꽃향기가 같이 버무려져 더 훌륭한 요리가 되는것만 같았다.


벚꽃잎이 단단히 나무에 붙어있다가 슬슬 흩날릴 때 쯤이면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돗자리를 가지고 나와 커다란 나무 아래 그늘에 깔아놓고선 봄소풍을 즐겼다.

어느 집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과 엄마 몰래 빼먹다 혼나는 시금치와 오이를 가득넣은 김밥을 해왔고, 딸기, 사과, 포도, 귤 형형색색의 과일들로 가득한 알록달록 과일도시락도 있었다.

우리엄마도 새벽같이 일어나 봄소풍 도시락을 만들었는데, 찐감자에 야채와 마요네즈, 설탕을 넣고 버무린 감자샐러드 샌드위치와

소고기, 우엉을 볶아넣은 새콤달콤 유부초밥이 가장 인기있었다.


아이들은 꽃비가 내리는 거리를 신나게 뛰어놀다가 한번씩 돗자리에 들러서는 음식을 한입 베어물곤 다시 뛰어나갔다.

그날만은 밥 먹을 때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혼나지 않아서 더 신이났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부드러운 벚꽃잎이 햇살과 함께 내릴때면 마치 반짝이는 별빛이 낮에 내리는 기분이었다. 빠르게 직선으로 내달리다가 금장을 휘감은 듯이 휘휘 돌며 뛰었다.


동네 강아지들도 벚꽃을 좋아했다.

아이들을 따라서 한 껏 힘내 뛰다가 벚꽃잎이 쌓인 잔디밭에 가서 몸을 이리저리 뒹굴었다.

보드라운 털에 지푸라기와 꽃잎을 한가득 묻히고선 '헤-'혓바닥을 내밀고 웃는 강아지들이 귀여워

모두가 똑같은 표정으로 '헤-' 미소지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던 봄에는 나도 우리 아롱이를 데리고 벚꽃을 보여주러 길을 나섰었다.

그날은 아롱이가 우리집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바깥공기를 쐬던 날이었다.

손바닥보다 아주 조금 큰 아기 강아지였다.

아롱이를 안고서 분홍팝콘들이 한가득 달린 벚꽃나무를 보여주곤 흩날리는 벚꽃잎을 만져보라고 바닥에 내려주었는데,

얼마나 겁이 났는지 한걸음도 못가곤 바들바들 떨며 다시 안아달라고 간절히 나만 바라보는게 안타까웠다.

이렇게 예쁘고 화창한 날을 즐기지 못하는 바보같은 아롱이가 야속했지만 조금 더 크고나면 아롱이도 흩날리는 벚꽃잎 속에서 동네 강아지들처럼 나를 따라 뛸거라 기대했다.


아름다운 벚꽃터널을 지나 등교를 한지 일주일쯤 지나면 슬프게도 언제나 강한 봄비가 내렸다.

힘차게 내리치는 강한 빗줄기에 벚꽃잎은 맥없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빗방울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내가 좋아하던 아침비 후의 풀내음 마저 그때만은 못돼보였다.


해마다 다시 찾아오는 연분홍빛 벚꽃이 올해도 어김없이 곧 피어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렘으로 가득하다.

두꺼운 겨울옷을 벗어내고 화사한 프릴이 가득달린 가벼운 봄 옷을 걸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서 나들이를 떠나보자. 그날만은 무거운 현실을 모두가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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