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은 국가의 칼날보다 무서운 것은 친절하고 온순한 다수가 쏟아내는 여론의 독재임을 직시했다. 그 무형의 폭력으로부터 고독한 개인을 건져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개의 깃발을 동시에 들었다. 하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외치는 공리주의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한 개인의 고유성을 숭배하는 자유의 깃발이다. 이 역설의 해답은 그의 해악 원칙에 있다.
“개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 외에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은 얼마나 냉소적이고 효율적인가. 밀은 착한 의도로 타인을 개조하려는 모든 오지랖, 모든 너를 위한 조언들을 단칼에 잘라낸다. 당신이 당신의 몸을 망치든, 돈을 탕진하든, 그것이 타인에게 명백하고 직접적인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사회는 그저 침묵해야 한다. 이는 사회 전체의 지적 자본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기적인 논리이기도 하다. 남의 삶에 개입하는 에너지를 각자의 자기 계발에 쓰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경고인 것이다.
이 원칙이 방어하는 세 가지 자유 영역, 특히 생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한 밀의 집착은 경이롭다. 그는 왜 반대 의견을 반드시 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네 가지의 실용적인 이유를 댄다. 그 이유는 마치 보험 설계사가 제시하는 위험 관리 보고서와 같다. 억압된 의견이 진리일 수 있는 보험, 오류일지라도 진리의 활력을 유지하는 소독약으로서의 가치라고 말이다. 밀은 인간 지성의 불완전함을 냉정하게 인정하며,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지적 겸손이야말로 문명의 작동 방식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밀이 진정으로 수호하려 했던 것은 개별성이었다. 개별성이란 그저 괴짜들의 기이한 취미를 허용하자는 낭만적인 주장이 아니다. 이는 마치 인간을 북극성을 바라보는 나무와 같이 보았던 통찰에서 나온다. 나무가 생명의 내적 힘에 따라 사방으로 뻗어 나가듯, 인간도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삶을 실험하고 발전시켜야만 그 사회가 비로소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격화된 인간은 얼마나 편리하고 효율적인가. 산업화 시대의 자본과 관습은 모든 인간을 찍어내는 틀을 만들고 싶어 한다. 밀은 바로 이 틀에 맞추려 노력하는 온순한 다수의 심리에 경고를 보낸다. 여론의 독재는 법보다 부드럽지만, 그 효과는 더욱 치명적이다. 법이 신체의 자유를 구속한다면, 여론은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여 모두를 생각 없는 평균인으로 만든다. 관습에 도전하는 괴짜들이 없다면, 문명은 그저 활력 없는 정체된 강물처럼 고여 썩게 될 것이라는 냉철한 판단인 셈이다.
밀의 자유론은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우리나라에 놀랍도록 정확한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국가 권력의 폭정으로부터는 상당 부분 해방되었으나, 착한 억압과 온순한 규격화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업과 대입, 취업이라는 단 하나의 북극성을 향해 모든 삶의 개별성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교육 시스템에서부터 온라인에서 순식간에 분노의 합창을 만들어내어 소수의 의견을 짓밟는 여론 재판까지, 이는 밀이 경고했던 여론의 독재가 디지털 기술의 증폭을 통해 얼마나 빠르고 가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예시이다. 우리는 지금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강요되는 도덕적 집단주의와 획일적인 성공 강요 속에서 고독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결국 자유론은 자유란 타인의 불편함, 심지어는 타인의 어리석음까지도 견뎌내야 하는 지난한 미덕임을 가르친다.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지적 겸손을 바탕으로, 타인의 삶의 방식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끊어내고 각자의 삶의 실험실을 지켜내는 것 말이다. 밀의 이 고전은 자유의 수호자로서의 시민적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