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다. 클림트의 황금빛 화풍을 기대하며 찾은 전시장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에곤 실레의 작품들이었다. 그의 그림들을 마주할 때마다 영혼을 관통하는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고, 특히 그의 작품인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앞에서 그 감각은 절정에 달했다.
이 자화상은 민음사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표지로 쓰인 바로 그 그림이었다. 수없이 마주쳤던 이미지임에도 그간에는 단순히 책 표지의 한 요소로만 스쳐 지나갔다. 실제 작품과 마주하니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선, 대담한 색채의 대비,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든 냉철한 자기 응시는 작가의 정신을 비추는 거울로 다가왔다.
이러한 강렬한 자기 응시의 순간은 자연스럽게 <인간실격>의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처연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요조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끝없는 불안과 소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는 한 인물의 궤적을 따라가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타인의 이해를 갈구하며 광대의 가면을 쓰고 살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린 요조는 결국 '인간실격자'라는 극단적 선언에 이른다.
실레의 화폭은 이런 <인간실격>의 세계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그는 인간의 본능과 내적 갈등을 뒤틀린 신체와 날카로운 색채로 표현했다. 특히 그의 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그러진 손'과 '과장된 관절'은 세상과 불화하는 내면의 고통을 시각화한다. 19세기말 빈 화단을 지배하던 우아하고 세련된 미학을 거부하고 그는 인간 정신의 어두운 지층을 파고들었다.
189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결성된 빈 분리파는 기존 예술계의 보수성에 저항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한 실레는 스승 클림트의 장식적 화풍을 넘어 더 과감한 표현을 추구했다. <죽음과 소녀>(1915)나 <포옹>(1917) 같은 작품에서 보이듯, 그의 예술은 '인간이란 결국 본능과 불안을 동시에 품은 모순적 존재'라는 통찰에 기반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2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타협 없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다자이가 <인간실격>에서 파헤친 영혼의 고뇌와 실레가 화폭에 담아낸 인간의 근원적 불안은 같은 지점을 향한다. 진정한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대부분이 침묵할 때 이들은 오히려 그 심연으로 뛰어들어 가차 없는 진실을 포착했다. 다자이는 문장으로, 실레는 붓질로 존재의 균열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단순한 허무나 절망의 표현이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탐구였다.
예술가의 진정성이란 결국 자기 자신과 얼마나 정직하게 마주 하느냐에 달려 있다. 실레의 자화상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강렬한 울림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붓질이 포착한 인간의 본질적 고독과 불안은 <인간실격>의 문장들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