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벌어진 두 지식인의 토론 번역 및 분석
1948년 1월 BBC 라디오 제3프로그램에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예수회 신부이자 철학자인 프레드릭 코플스톤(Frederick Copleston) 사이에 신의 존재에 대한 유명한 철학 논쟁이 벌어졌다. 이 토론은 우주론적 논증(특히 우연성과 충분한 이유에 근거한 논증)과 도덕적, 종교적 경험에 대한 논증이라는 두 가지 핵심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코플스톤은 철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러셀은 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그 증명에 의문을 제기한다. 두 사람의 역사적인 논쟁 내용을 한국어 대화체로 충실하게 번역했고, 이어서 논쟁의 주요 쟁점을 주제별로 간략히 정리한 후 각 주장에 대한 논리적 평가와 비판적 분석을 정리했다.
코플스톤: 우리가 신의 존재를 논의하려는 만큼, 먼저 ‘신’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잠정적으로라도 합의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신’이란 세계와 구별되는 최고 수준의 인격적 존재로서 세계의 창조자를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어요. 적어도 잠정적으로, 이런 정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러셀: 네, 저는 그 정의에 동의합니다.
코플스톤: 제 입장은 그런 존재, 다시 말해 방금 정의한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affirm(긍정)하는 쪽이며, 철학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입니다. 반면 러셀 경의 입장은 불가지론인지, 아니면 무신론인지 궁금합니다. 즉,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러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제 입장은 불가지론자입니다. (※ 러셀은 신의 불존재를 100% 확증하지는 않지만, 신 존재에 대한 증거를 모르므로 “알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나타냄.)
코플스톤: 신의 존재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에는 동의하시겠지요? 예를 들어,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와 인류 역사는 오로지 인간 스스로 부여하는 목적밖에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목적이란 결국 힘 있는 사람들이 강제로 부여하는 목적이 될 가능성이 크겠지요. (※ 신이 없다면 절대적 가치나 궁극적 목적이 없고, 강자가 자기 뜻을 목적이라 부여할 뿐이라는 취지.)
러셀: 대략적으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다만 방금 말씀하신 마지막 부분에는 제가 몇 가지 제한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 러셀은 “신이 없을 때 목적 부여”에 관한 코플스톤의 진술에 다소 보완하고 싶은 점이 있음을 시사하지만, 큰 틀에서는 동의.)
코플스톤: 그렇다면 절대적 존재인 신이 없다면 절대적 가치도 없고,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 되어버린다는 말씀이예요. 다시 말해, 절대선(絶對善)이 없다면 모든 가치의 기준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동의하시나요?
러셀: 저는 그 두 문제가 논리적으로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G.E. 무어의 《Principia Ethica》를 보시면, 무어는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한 개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습니다. 선과 악의 존재를 논하는 데 꼭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죠.
코플스톤: (무어의 견해는 일단 접어두고) 좋습니다. 도덕적 선악 문제는 잠시 뒤 도덕 논증을 다룰 때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형이상학적 논증부터 제시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라이프니츠의 “우연성에 근거한 논증”, 즉 일종의 우주론적 논증에 주된 무게를 두고자 합니다. 먼저 제가 이 형이상학적 논증의 요지를 간단히 말씀드리고, 그 후에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요?
러셀: 그거 좋군요. 그렇게 하시지요.
코플스톤: (논증을 펼치며) 명확하게 하기 위해 몇 단계로 나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 세계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기 자신 안에 갖고 있지 않은 존재자들이 적어도 몇 가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제 부모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지금도 공기와 음식 등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째, 여기서 말하는 ‘세계’란 개별 사물들의 현실적 (또는 관념적) 전체를 가리키는 것뿐입니다.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개체들 외에 세계라는 별도의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인류라는 것이 결국 개개 인간들의 집합에 불과하지, 그 구성원들과 별도로 독립된 실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경험하는 모든 개별 존재나 사건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할 때, 개별 객체들의 총합인 세계 전체 역시 자기 자신으로는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세계(개별 사물들의 총합)가 자기 외부에 그 존재의 이유를 가져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존재 이유는 어떤 하나의 실재하는 존재자여야 합니다.
이제, 그 존재자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지닌 존재이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존재 둘 중 하나일 겁니다. 만약 스스로 존재 이유를 지닌다면(자기 존재의 충분한 근거를 자기 본질 안에 가진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더 근원적인 설명을 향해 계속 거슬러 올라가야겠지요. 그런데 만일 그런 식으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간다면, 결국 존재 자체에 대한 최종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끝없이 “이것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기만 하고, “왜 아예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어떤 존재에 이르러야 합니다. 즉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필연적 존재가 있어야 세계와 일체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러셀: (잠시 생각하며) 지금 아주 많은 쟁점들이 한꺼번에 제기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다소 막막하지만, 아마도 선생님께서 방금 제시하신 논증에 답하려면 “필연적 존재”라는 개념 문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는 “필연적”(necessary)이라는 말은 오로지 명제에만 의미 있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분석 명제(analytic proposition)에만 해당된다고 봐요. 다시 말하면, 부정하면 스스로 모순이 되는 명제들에게만 “필연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존재자를 “필연적 존재”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자기모순이 되는 경우에 한해서라고 저는 보겠습니다. 저는 부정하면 모순이 되는 존재자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인데… 우선 선생님께서도 라이프니츠가 말한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의 구분을 받아들이는지 알고 싶군요.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성의 진리(이치의 진리)는 필연적이고 분석적인 명제들이고, 사실의 진리는 contingent(우연적인 사실)의 진리라고 구분했지요. 선생님도 이 구분에 동의하십니까?
코플스톤: 음, 저는 라이프니츠가 말한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에 대한 구분 전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모든 진리가 분석적 명제로 환원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지적(全知的)인 지성을 가정하면, 사실의 진리도 궁극적으로는 이성(이치)의 진리, 다시 말해 분석적 진리로 환원된다고 보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견해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 의지 경험 같은 것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요.
제 입장이 라이프니츠 철학 전체를 옹호하자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우연한 존재로부터 필연적 존재로 나아가는 라이프니츠의 논증, 즉 충분한 이유의 원리(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에 입각한 논증을 활용했을 뿐입니다.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논증을 간결하고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해서 차용한 것이지,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통째로 받아들이자는 건 아닙니다.
러셀: 그러나 제 생각에, “필연적 명제”라고 한다면 그건 결국 분석 명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필연적”이라는 말의 다른 의미를 저는 떠올릴 수가 없군요. 그리고 모든 분석 명제는 언제나 복합적이고 논리적으로는 사후(事後)에 등장하는 명제들입니다. (예를 들어) “비이성적 동물은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분석적이지만, “이것은 동물이다” 같은 명제는 분석적이지 못하지요. 대체로 분석 명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논리적 체계에서 볼 때 비교적 뒤에 나오는 편입니다. (※ 러셀은 “필연적 명제 = 분석 명제”라는 입장을 재강조하며, 분석 명제는 모두 사실 규명이 아닌 용어 정의에 가까운 진리들이므로 존재 문제에 직접 쓰일 수 없다고 시사함.)
코플스톤: 그렇다면 “만약 어떤 우연적 존재가 존재한다면, 필연적 존재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봅시다. 저는 이 명제가 가정법 형태로 표현되었을 때 필연적 진술이라고 봅니다. 러셀 경께서 모든 필연적 명제를 분석 명제라고 부르시겠다면, 용어상의 논쟁을 피하기 위해 그 명제 역시 분석 명제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단순한 동어반복(자명한 공리)은 아니에요.
다만, 그 명제가 필연적 진술이 될 수 있으려면 전제가 필요합니다. “우연적 존재가 하나라도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 선행되어야겠지요. 그리고 “우연적 존재가 있다”는 명제는 분명 분석 명제는 아닙니다. 경험을 통해 알아야 하는 진술이니까요. 그러나 일단 우연적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반드시 필연적 존재가 존재한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고 저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러셀: 이 논증의 어려움은, 제가 “필연적 존재”라는 관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른 존재들을 “우연적”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필연적 존재, 우연적 존재라는 어구들은, 제가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논리 체계 안에서나 유의미한 용어들이지, 제게는 그다지 실질적인 의미가 없어요.
코플스톤: 말씀하시는 “받아들이지 않는 논리”라 함은, 이 개념들이 “현대 논리학”과 맞지 않다는 뜻인가요?
러셀: 제게는 이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찾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필연적”이라는 단어는 분석 명제에 적용할 때 외에는 쓸모 없는 단어라고 봅니다. 대상(사물)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는 개념이지요.
코플스톤: 우선 “현대 논리학”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시는지요? 제 생각에 현대 논리학이라 불리는 것도 여러 체계가 있어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모든 현대 논리학자가 형이상학적 용어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현대 논리학에 정통하면서도 형이상학을 무의미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매우 저명한 사상가를 우리 둘 다 한 사람 이상 알고 있지요. (웃음) 설령 모든 현대 논리학자가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해도, 그렇다고 그들이 옳다는 결론이 바로 따라나오는 건 아닐 겁니다. “형이상학적 용어는 무의미하다”는 주장 자체가 이미 어떤 철학적 전제를 깔고 하는 말이니까요.
제가 보기엔, 그 뒤에 깔린 독단적 전제는 이런 것입니다: “내 논리 기계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무의미하거나 그저 감정의 표출일 뿐이다.” 저는 지금, 어떤 특정한 현대 논리 체계만이 의미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우기는 것이 얼마나 독단적인 태도인지를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결국 부분적 관점에 불과한 한 논리 체계를 마치 철학 전체의 기준인 양 우기는 셈이니까요.
어쨌든, “우연적 존재”란 자기 존재를 완전하게 설명해줄 이유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를 뜻합니다. 러셀 경도 아시다시피,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자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지요.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우리 밖의 어떤 것이나 누군가를 참조해야 합니다. 예컨대 부모님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필연적 존재”는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물론 러셀 경께서는 그런 존재는 없다고 주장하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용하는 용어를 전혀 이해 못 하시겠다고는 믿기 어렵군요. 정말로 그 개념을 전혀 이해 못 하신다면, 애초에 “그러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자격도 없지 않겠습니까? (미소)
러셀: 몇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만, 지금 깊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저는 형이상학 일반이 다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특정한 몇몇 용어들에 대해서는 제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일반적인 독단으로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저의 솔직한 입장입니다. (이 부분은 우선 논외로 하지요.)
그 대신, 선생님 말씀이 결국 우리를 다시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쪽으로 데려가는 것 같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즉 “본질에 존재가 포함되는 어떤 존재자가 있다”, 그래서 그 존재자의 존재는 분석적인 진리(부정하면 모순인 진리)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저는 그런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봅니다. 애초에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부터 짚어봐야 할 텐데, 제 생각으로 어떤 주체(대상)가 이름으로 지목되었을 때 그 “~는 존재한다”는 식으로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존재한다는 진술은 항상 어떤 기술(기술구, description) 형태로 이루어져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존재”라는 것은 분명 속성(술어)이 아니니까요. (※ 칸트와 러셀의 관점: “존재”는 대상의 속성이 아니며, “A가 존재한다”는 것은 A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적어도 하나 있다는 기술적 진술로 파악해야 한다는 취지.)
코플스톤: (잠시 생각한 뒤) 러셀 경께서는 “T.S. 엘리엇은 존재한다”처럼 말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잘못이며, “그는 《대성당 살인》(Murder in the Cathedral)의 저자이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와 같이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지요. 그렇다면 “세계의 원인이 존재한다”는 명제 역시 문법이 잘못되었거나 무의미하다고 보십니까? 물론 러셀 경께서 “세계에는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실 수는 있겠지만, “‘세계의 원인이 존재한다’는 명제 자체가 무의미하다”고까지는 말씀 못 하실 것 같습니다. 아예 평서문이 문제라면 “세계에 원인이 있는가?” 혹은 “세계의 원인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형식으로 바꿔보지요. 이 질문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의미는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답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질문 자체는 분명하게 알아듣겠지요.
러셀: 물론 “세계의 원인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네, 하나님이 그 세계의 원인이다”라고 대답하면서 하나님을 고유명사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진술은 제가 볼 때 의미를 상실합니다. 제 주장은 바로 그 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개체가 “존재한다”는 명제는 분석적 명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존재하는 원형의 네모는 존재한다”라고 주어-술어를 구성하면, 언뜻 분석 명제처럼 보일지 몰라도 애초에 그런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니 공허한 말이지요.
코플스톤: 맞습니다, “존재하는 원형의 네모”라는 말은 애초에 아무 의미가 없지요. (웃음) 그리고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면, 최소한 존재란 무엇인지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부정도 할 수 있을 겁니다. (※ “존재” 개념이 전혀 없다면 “~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못 할 것이라는 취지이나, 약간 논점에서 빗나간 언급일 수 있음.)
러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저는 필연적 존재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로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필연적 존재”라는 말 역시, 결국 의미를 제대로 규정할 수 없는 용어라고 보거든요. (앞의 “존재하는 원형의 네모”처럼 자명한 모순 개념이라고 암시함.)
코플스톤: 결국 막다른 길(교착 상태)에 다다른 것 같군요. 저에게 “반드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 즉 필연적 존재란 분명한 의미를 가진 개념인데, 러셀 경께는 전혀 의미가 없는 말씀이니 말입니다.
러셀: 그래도 좀 더 이 문제를 파고들어봅시다. “반드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선생님 견해에 따르면 그 존재자의 본질(essence) 속에 실존(existence)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코플스톤: 그렇습니다. 본질 자체가 “존재”인 존재자를 뜻하지요. 하지만 저는 신의 존재를 증명함에 있어서, 신의 본질 개념만으로부터 증명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우리가 아직 명확히 직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험 세계로부터 신으로 나아가는 논증, 즉 귀납적/경험적 방법을 써야 한다고 봅니다.
러셀: 아, 존재론적 논증(본질 개념만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과 우주론적 논증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 차이는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아는 지성이 있다면 분명 “본질에 존재가 포함된 존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코플스톤: 네, 분명히 누군가 직접 신을 “본다면”(신적 실재를 직관할 수 있다면)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될 겁니다. (※ 신의 본질을 완전히 알 수 있다면 그 본질에 존재가 함의됨을 알 것이라는 취지.)
러셀: 그러니까 정리하면, “본질에 존재가 포함된 어떤 존재자가 실제 있다”는 것이겠지요. 비록 우리가 그 본질(essence)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 아는 상황 말입니다. (※ 러셀이 보기에 코플스톤은 “본질=존재인 존재자”가 있다고 가정하지만 인간은 그 본질 자체는 모른다고 주장하는 셈.)
코플스톤: 그렇습니다. 다만 그 본질을 선험적으로(a priori) 아는 것은 불가능하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a posteriori)을 통해서 비로소 그 존재자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그 존재자의 본질과 실존은 동일해야만 한다고 우리는 추론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신의 본질과 신의 실존이 서로 다르다면, 신 존재에 대한 어떤 충분한 이유를 신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모순이 생길 테니까요. (※ 신이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본질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신 밖의 원인을 찾아야 하므로, 결국 신도 우연적 존재가 되어버리는 모순을 지적함.)
러셀: 결국 핵심은 “충분한 이유”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아직 “충분한 이유”를 제가 이해할 수 있게 명확히 정의해주시진 않은 듯합니다. “충분한 이유”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뜻합니까? 혹시 “원인(cause)”과 같은 의미는 아니신지요?
코플스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원인은 일종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오직 우연적 존재만이 원인을 가질 수 있는 법이니까요. 신은 자신의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스스로의 원인은 아닙니다. (코플스톤은 “자기 원인”이라는 표현을 피함. 원인은 시간적, 인과적 개념이라 신에게 적용 못 하지만, 신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자기 안에 가진다고 설명함.) 제가 말하는 충분한 이유란, 어떤 존재가 왜 존재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설명(근거)을 의미합니다. 특정 존재의 존재에 대해, 더 이상 보충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한 궁극 설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러셀: 그런데 어떤 설명이 “충분(adequate)”하다고 판단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제가 성냥을 그어서 불꽃을 일으켰다고 합시다. 누군가 “어쩌다 불이 붙었나?” 물으면, “내가 성냥을 상자에 문질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설명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닌가요? 일반적으로는 그것만으로 “이 불이 붙은 이유”를 다 설명했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코플스톤: 일상적인 실용적 목적으로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그것은 결국 부분적인 설명에 불과합니다. 완전하고 충분한 설명이란 결국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는 “전체적 설명”이어야 합니다. (성냥의 예를 들면) 성냥이 왜 존재하고, 왜 문지르면 불이 붙게 되는지 등 모든 관련 요소를 포함한 최종적 설명이어야 “충분한(reason sufficient)” 설명이라 할 수 있겠죠.
러셀: 그렇다면 저는 선생님께서 애초부터 얻을 수 없는 것을 찾고 계신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애당초 기대해서도 안 되는 것을 기대하고 계신 것 같군요. (※ 세계 전체의 궁극 설명은 인간이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뉘앙스.)
코플스톤: 아직 못 찾았다고 말하는 것과 처음부터 찾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존재의 궁극 설명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처음부터 그런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예요. 존재에 대한 설명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하지 말라는 태도는, 제 생각에 오히려 독단적입니다. (러셀의 “찾을 수 없고 기대할 수도 없다”는 태도를 비판)
러셀: 글쎄요... 제 말은, 어떤 하나를 설명하면 또 다른 것을 원인으로 들게 되고, 그 원인을 설명하려면 또 다른 것을 가져와야 하며... 이런 식으로 “슬프고도 완전한 만물의 체계” 전체를 다 파악해야 선생님이 원하는 최종적 설명에 도달할 텐데, 그런 것은 우리 능력 밖이라는 것입니다. (“this sorry scheme of things entire”는 오마르 하이얌의 시 구절로, 인생/세상의 온갖 이치라는 뜻으로 인용한 표현. 러셀이 완전한 설명 추구를 시도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 표명.)
코플스톤: 그렇다면 이 우주 전체, 방금 말씀하신 “슬프고 완전한” 이 만물 전체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질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할 수 없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있는가?”라는 궁극 질문 자체를 아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지요?
러셀: 네, 저는 그런 질문 자체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세계)”라는 단어는 어떤 문맥에서는 편리한 단어지만, 그 단어가 지칭하는 실체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세계” 혹은 “우주”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의 집합을 가리키는 편의상 쓰는 말일 뿐이지, 그게 또 하나의 별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러니 그 전체에 대해 ‘왜 존재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코플스톤: 만약 “세계”라는 말이 무의미하다면, 그렇게 아주 편리하게 쓰일 수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웃음) 어쨌든, 저는 우주(세계)가 그 구성 사물들과는 다른 별개의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까 제 논증 개요에서 밝힌 것처럼, 세계는 그걸 구성하는 객체들과 동떨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니지요. 제가 하려는 것은 그 객체들, 곧 우주를 구성하는 현실적인 (혹은 관념적인) 개별 사물들의 총체에 대한 존재 이유, 여기서는 “원인”을 찾는 일입니다. 반면 러셀 경께서는 “우주(또는 제 존재, 또는 그 어떤 존재든)이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한데, 제 말을 이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러셀: 먼저, “무의미한 단어는 편리할 수도 없다”는 지적에 답하겠습니다.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사실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 예컨대 “the(정관사)”나 “than(~보다)” 같은 단어를 생각해보세요. 이런 단어들은 어떤 대상(object)을 직접 가리키는 의미를 갖지 않지만 매우 유용한 단어들이지요. 저는 “우주”라는 말도 비슷한 경우라고 봅니다. 특정 사물을 직접 가리키는 건 아니지만 유용한 표현일 수 있다는 거죠. (이 점은 차치하고) 선생님께서 제게 “우주가 이해 불가능(unintelligible)하다고 보느냐”고 물으셨는데, 저는 “이해 불가능하다”고까지 표현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우주(만물 전체)가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해 가능성”이라는 것은 제 관점에서는 좀 다른 의미예요. 어떤 것이 이해 가능하다는 것은 그 대상 자체를 본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고, “설명된다”는 것은 그 대상이 갖는 관계나 근원을 밝힌다는 뜻이니까요. 저는 우주 자체는 외부에 원인이나 근거가 없어서 설명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내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코플스톤: 글쎄요, 제가 보기에 세상(세계)은 신의 존재 없이는 본질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만약 신이 없다면 우주라는 일련의 모든 사건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거저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이를 “우주는 부조리하다”(gratuitous)고 표현했지요). 그리고 우주 내에 사건들이 무한히 이어지는 시리즈를 가정하더라도 (가로로, 수평적 시리즈라고 표현합시다), 그 사실은 제 논점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비유를 들어볼까요? 초콜릿을 계속 더한다고 해서 양을 키워봐야 초콜릿이 나올 뿐, 양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초콜릿 수를 무한히 더해도 초콜릿일 뿐이듯, 우연적 존재를 무한히 늘어놓는다 해서 갑자기 필연적 존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우연적 존재들이 아무리 많은 연속을 이루어도, 하나의 우연적 존재가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전체도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런데도 러셀 경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물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은 정당하지만, 전체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혹시 제가 잘못 짚었을까요?
러셀: 아닙니다. 특정한 개별 사물의 존재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것의 원인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면 저는 그것을 당연히 정당한 질문이라고 봅니다.
코플스톤: 그렇다면, 왜 하필 하나의 개별 사물에서 멈춰야 합니까? 왜 존재하는 모든 개별 사물 전체에 대한 원인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거죠?
러셀: 저는 그럴 만한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인(cause)”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가 개별적인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이끌어낸 개념이죠. 저는 그런 개념을 이 전체에 적용해야 할 어떤 이유도 못 찾겠습니다. 전체인 우주에는 원인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코플스톤: “원인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과, “원인을 찾지 않는다”는 태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떠한 원인도 없다는 주장은, 찾을 대로 다 찾은 끝에 아무 원인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나 할 법한 이야기예요. 처음부터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건 곤란합니다. 그리고 만약 전체인 우주에 아무 원인이 없다면, 결국 스스로 자기 자신의 원인이어야 할 텐데, 제게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세상은 그냥 그저 거기 있을 뿐이고,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다”는 식의 대답은, 마치 그런 질문이 처음부터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내놓는 답변일 뿐이에요. (※ “세상은 그냥 존재할 뿐”이라는 답은, 마치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말하지만 사실상 아무 설명도 안 되는 말이라고 비판.)
러셀: 꼭 우주가 자기 자신의 원인이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제 말은, “원인”이라는 개념을 전체인 우주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원인이 없다”는 것과 “애초에 원인 개념이 적용 불가능”은 다릅니다.)
코플스톤: 그럼 결국 러셀 경께서는 사르트르(Sartre)와 비슷하게 “우주는 그저 아무 이유 없이 거저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하시는 건가요? (※ 사르트르는 소설 《구토》에서 “세계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gratuitous)고 주장한 바 있음.)
러셀: 저는 “부조리하다”(gratuitous)는 표현은 별로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은 마치 다른 가능성도 있는데 괜히 그렇게 된 것처럼 들리니까요. 저는 그냥 “우주는 그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게 전부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코플스톤: 저는 여전히 전체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 부당하다는 견해를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를 어떻게 금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개별 원인들을 찾아 경험 과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만, 그렇다고 “원인”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러셀 경께서 칸트주의자도 아니시잖아요? 만약 “원인”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무의미한 말이거나, 칸트의 주장대로 그저 인간 이성의 형식에 불과하다면 전체에 원인을 묻는 게 허황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러셀 경은 “원인” 개념이 무의미하다고 보시는 것도 아니고, 칸트처럼 인간 경험 바깥의 원인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칸트는 인과율을 현상의 세계에 제한함으로써 “신은 원인인가?” 같은 초월적 원인 개념을 무의미하다고 본 바 있음. 코플스톤은 러셀이 칸트식 비판을 하는 건 아니라고 지적.)
러셀: 제 생각에, 선생님의 논증에는 잘못된 확장(fallacy)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는 어머니가 있지요. 그러나 “인류라는 전체 집단도 어머니가 있다”고 말한다면 어리석은 논리가 됩니다. 인류 전체는 어머니를 갖고 있지 않지요. 논리 범주가 다른데 같은 식으로 적용한 오류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우주 원인 논증이 이와 비슷한 잘못을 범한다고 봅니다.
코플스톤: 흥미로운 비유지만, 제 주장은 그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현상적 원인이 있다. 따라서 전체 우주도 현상적(물리적)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분명 러셀 경 비유의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가 있으니 인류도 어머니가 있다”와 똑같은 오류일 겁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모든 개별 사물은 현상계 내 원인을 갖는다. (비록 그 원인들이 무한히 이어진다 해도) 그러나 그런 현상적 원인들의 연쇄(시리즈)만으로는 그 연쇄 자체의 존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연쇄 전체에는 현상 세계 밖의 초월적 원인(이유)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어머니 비유와 제 논지는 다르지요. 저는 전체를 그 구성원과 동일선상에서 보지 않고, 초월적인 차원의 설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러셀: 하지만 여전히 개별 사물마다 원인이 있으니 전체에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깔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가정을 뒷받침할 아무 근거도 찾지 못하겠어요. 만약 선생님께서 왜 전체도 원인을 가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제게 주실 수 있다면, 기꺼이 들을 용의가 있습니다만.
코플스톤: 좋습니다. 우주는 “원인(이유)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만약 원인이 있다면, 당연히 그 원인은 우주 바깥에 있는 무언가여야 합니다. 반대로 우주에 원인이 없다면, 우주는 스스로 존재에 충분한 근거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존재를 필연적 존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렸듯, 우주는 필연적 존재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를 구성하는 각 개별 존재가 모두 우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주 전체는 각 부분을 떠나 별도로 실재하는 게 아니므로 (우주는 그 구성원들의 집합일 뿐이므로), 구성원이 우연적인 한 전체도 필연적일 수 없지요. 따라서 우주는 그냥 무원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어떤 원인을 가져야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세계는 단순히 거기 있을 뿐이고 설명 불가능하다”는 식의 주장은 논리분석을 통해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이 결코 아닙니다. (※ 논리적으로 추론한 결론이 아니라는 말은, 논증 없이 임의로 주장하는 태도라는 비판.)
러셀: 잘난 척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저는 선생님께서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생각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웃음) 모든 사물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필연성도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원자 내 개별 양자 도약(quantum transition)은 아무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연과학에서도 “특정 사건에는 원인이 없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최소한 어떤 물리학자들은 인과적 설명 없이도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인과 없이 존재를 생각해보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코플스톤: 그 점은 일시적인 결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마치 원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향후 이론이 발전하면 인과를 파악할 수도 있으니까요.
러셀: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최소한 물리학자들이 그런 현상을 개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 말은 증명됩니다. 인간 지성이 원인 없는 사건을 아예 생각조차 못 하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이니까요.
코플스톤: 물론 일부 과학자들(물리학자들)은 제한된 영역에서 비결정론을 인정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런던 대학의 딩글(Dingle) 교수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자연 자체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현재의 원자 이론이 관찰을 완전히 연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많은 물리학자들이 그 견해를 받아들이지요. 어쨌든, 물리학자들은 실제 연구에 있어서는 (설령 철학적으로는 인과성을 완화한다고 해도) 결국 자연의 질서와 합리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과학이라는 작업 자체가 자연에 내재한 규칙성과 설명 가능성을 믿지 않고서는 진행될 수 없잖아요. 물리학자도 어느 정도는 자연에 원인이 있다는 가정을 암묵적으로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탐정이 살인 사건을 수사할 때 범인의 존재와 범행 동기가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형이상학 연구자들 역시 현상(겉에 드러난 사건들)의 이유나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전제하고 출발합니다. 저는 칸트주의자도 아니니, 형이상학자가 그런 전제를 취하는 것이 물리학자만큼이나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가 “세계는 이유 없이 있다”고 말했을 때도, 그 “아무 이유 없다”는 말이 함의하는 바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결과라고 봅니다. (※ “아무 이유 없다”는 것도 일종의 형이상학적 주장인데, 정당한 탐구 끝에 나온 결론이라기보다 성급한 선언이라는 의미.)
러셀: 제 생각에는 여기 부당한 일반화가 있다고 봅니다. 과학자(물리학자)가 원인을 찾아 나선다고 해서, 모든 현상에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금광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 사람은 금을 찾아 돌아다니지만, 그렇다고 온 세상에 금이 편재해 있다고 전제하는 건 아닙니다. 금맥을 찾으면 다행이고, 못 찾으면 운이 나쁜 것이지요. 물리학자가 자연 현상의 원인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찾으려 노력하는 것과 애초에 반드시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다르지요.
그리고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솔직히 제가 그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니 제가 멋대로 해석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설명”을 가진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라고 봅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과학자가 전제한다고 하신 내용도 약간 과장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러셀은 코플스톤이 “과학자는 인과 질서를 전제한다”는 말을, “과학자가 모든 현상에 원인이 있다고 독단적으로 가정한다”고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반박함. 이어서, “세상에 설명이 있으리라 기대할 필요 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거듭 밝힘.)
(2편에 계속)
https://youtu.be/wMsbD1L5IlQ?si=9UszR1WkZRFYu5Ne
현대철학자 중에서 러셀만큼 말투가 자명한 사람도 잘 없는 것 같아요. 가끔씩 인터뷰 보다가 웃기기도 하고 말투가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아하는 사람인데 여기서 보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