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벌어진 두 지식인의 토론 번역 및 분석
(1편에 이어서)
코플스톤: (미소 지으며) 이제 형이상학적 논증에 대해서는 서로 입장이 확실히 드러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종교적 경험에 대해 말씀을 나눠볼까요? 그 다음 도덕적 경험으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종교적 경험의 경우 논증의 성격이 조금 달라지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엄밀한 의미의 “증명”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종교 경험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가설은 신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종교적 경험”이란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감정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에 가득 차 있지만 명확히 규정되지는 않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대상을 마주한다는 느낌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상의 경험 대상을 모두 뛰어넘는, 그릴 수도 없고 개념화할 수도 없는 무엇에 대한 의식이지요. 그리고 그 경험을 하는 동안에는 그 대상의 실재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고들 합니다. (물론 경험이 끝난 후에는 의심이 들 수 있겠지만요.)
저는 이러한 종교적(신비적) 체험이 순전히 주관적인 현상만으로 남김없이 완벽히 설명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 근원적인 체험 자체는, 차라리 어떤 객관적 원인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설명이 쉽다고 생각합니다. 요약하자면, 신비가(mystic)들이 보고하는 강렬한 신적 체험은 실제로 그 원인이 되는 객관적 존재(신)이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러셀: 지금 말씀하신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의 정신 상태로부터 출발해 외부의 어떤 존재를 추론하는 모든 논증이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런 추론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사례가 있긴 합니다만, 그 경우에도 따져보면 “다수의 사람들 간의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한 방 안에 많은 사람이 있고, 벽에 시계가 걸려 있다면 모두가 그 시계를 봅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본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저건 내 환상이 아니고 실재하는 시계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하지만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은 대개 철저히 사적(private)인 경험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체험은 다른 사람이 함께 검증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코플스톤: 맞습니다, 매우 사적인 신비 체험이지요. 저는 어디까지나 “엄밀한 의미의 신비(mystical) 체험”에 한정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별로 환상이나 환청 같은 환시(vision) 현상은 여기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일종의 주관적 시각 이미지일 수 있기에, 논외로 하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말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자아를 뛰어넘는 초월적 실재에 대한 경험 그 자체입니다.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가 어떤 강연에서 “종교적/신비적 경험은 사랑에 빠지거나 시와 예술을 감상하는 것만큼이나 실제적인 경험”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시나 예술을 감상할 때는 구체적인 시 작품이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고, 사랑에 빠질 때도 실재하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아무도 아닌 존재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러셀: (이야기 도중 가볍게 끼어들며) 항상 그런 건 아닙니다! (웃음) 일본 소설가들은 자기 작품이 성공했다고 인정하려면, 수많은 실제 사람들이 그 소설 속 허구의 영웅(여주인공)을 사랑한 나머지 목숨을 끊을 정도여야 한다고 여기곤 합니다.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도 사람들에게 강렬한 감정과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지요.
코플스톤: (웃으며) 일본에서 벌어지는 그런 일들은 제가 직접 본 바가 없으니 러셀 경 말씀을 믿어야겠군요. 저 자신은 다행히도 소설 속 인물 때문에 자살까지 갈 정도의 일은 없었습니다만, 두 명의 위인 전기를 읽고 크게 감화되어 제 인생의 중요한 걸음 두 가지를 결정한 적은 있습니다. 책 속 인물들이 제게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 경험과 진정한 신비 체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외부인이지만, 신비 체험자들의 기록을 읽어본 한에서 제 삶에 영향을 준 책 읽기 경험과 그들의 신비 체험은 근본적으로 달라 보입니다.
러셀: 제 말은, 우리가 신을 소설 속 허구 인물과 같은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대상이 픽션 속 주인공과 동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실 테지요? 이 점은 저와 의견이 같으리라 봅니다만.
코플스톤: 물론이지요. 신을 허구 인물 취급해서는 안 되죠. 다만 제 논지는, 신비 체험을 순전한 주관 내부의 착각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삶과 동떨어져 있거나, 착란 상태에서 환청을 듣는 것처럼 헛된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 환각과 착각으로 점철된 경우는, 그 사람의 삶의 변화와 체험 사이에 별 연관이 없거나 오히려 해로운 결과를 낳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성 프란체스코와 같은 전형적인 참된 신비가를 생각해보세요. 그의 신비 체험은 넘치는 활력과 창조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그런 순수한 유형의 신비 체험일수록,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결국 실제 객관적인 어떤 원인(신)의 존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성 프란체스코(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신비 체험을 통해 극도의 박애와 헌신의 삶을 산 성인. 그의 삶의 열매를 볼 때, 그 체험은 착각이 아니라 실제 신과의 만남으로 설명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
러셀: 저는 “신이 절대 없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적 체험들의 기록을 저는 그저 다른 것들을 대하듯 검토할 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사람들이 보고한 갖가지 체험 가운데 선생님께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이를테면 악마나 귀신을 봤다거나 들었다는 이야기도 수도 없이 보고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런 보고들은 신비가들의 신 체험 보고와 똑같은 확신과 어조로 기술되곤 합니다.
만약 어떤 신비가의 비전(vision)이 참이라면, 논리상 그가 본 악마들도 참일 수 있겠지요. 신비주의자가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다고 주장한다면, 악마를 봤다는 신비주의자도 자기 체험이 참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악마나 귀신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그 모든 것을 다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실 테지요. (“신 체험”만 인정하고 “악마 체험”은 안 믿는다면 기준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암시함.)
코플스톤: 악마의 사례를 말씀하셨는데,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악마를 보았다고 하거나 악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그런 경우는 대개 눈으로 본 환영이라든지 외적으로 나타난 형상 등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런 시각적 환영들은 그 대상이 실제 존재하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눈 앞에 보이는 천사나 악마의 형상 같은 것은 여기서 제외합시다.
러셀: 하지만 실제로 “악마가 내 마음에 말을 걸었다”, “사탄의 음성이 내면에서 들렸다”고 믿는 사람들이 숱하게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겉모습을 본 환상이 아니고, 순전히 내면적(정신적)인 체험으로 악마와 소통했다고 믿은 사례들이지요. 그런 체험은 신비가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체험과 종류가 똑같아 보입니다. 신비가들의 체험담만 가지고 논증을 삼는다면, 그 논증은 동일하게 악마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결국 신비 체험을 신의 존재 증거로 삼는다면, 같은 논리로 악마의 존재 증거로도 삼아야 하는데, 그건 곤란하지 않겠어요?
코플스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서 사탄을 보았거나 들었다고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탄의 실존을 완전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그 논쟁은 차치하죠.) 하지만 중요한 점은, 악마를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신비가들이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비기독교 신비주의자인 플로티노스(Plotinus)를 생각해봅시다. 그가 말한 궁극의 신비 체험은 한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inexpressible)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일자, the One)은 사랑의 대상이라고 했어요.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체험의 결과는 플로티노스 자신의 삶으로 증명되었지요. 플로티노스의 제자인 포르피리우스(Porphyry)가 남긴 전기 기록을 보면, 플로티노스가 매우 친절하고 자애로운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 삶의 모습을 볼 때, 그가 진정 그런 신비 체험을 했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신비 체험이 한낱 자기기만이었다면, 그렇게 거룩하고 선한 삶의 열매를 맺기는 어려웠겠지요.)
러셀: 어떤 믿음이 한 사람에게 좋은 도덕적 효과를 미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믿음이 참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 러셀의 유명한 격언: “어떤 믿음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참임을 증명해주지 못한다.”)
코플스톤: 저도 그 효과만으로 곧바로 참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지닌 신앙(믿음)이 그의 삶에 분명한 선한 영향을 주었고, 그 믿음 자체가 그 원인임을 명백히 입증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 믿음의 긍정적인 부분에는 진리가 어느 정도 함의되어 있다고 추정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믿음 전체의 진리성이 그대로 증명된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핵심은, 신비가의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을 그가 자신의 체험을 진실하게 보고했고 정신적으로도 온전하다는 증거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경험한 대상(신)의 실제 존재 여부를 직접 증명하는 게 아니라요. (※ 코플스톤은 “도덕적 선결과 → 진리”를 완강히 주장하지 않고, 선한 삶을 살았다면 적어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거나 미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함.)
러셀: 하지만 저는 그 정도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심오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인격이 크게 변한 적이 있습니다. 제 자신이 생각하기에 훨씬 좋은 방향으로 변했다고 여겼지요. 그 체험들은 내게 정말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 어떤 나 밖의 독립된 존재를 만났던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내 내부에서 일어난 정신적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설령 제가 그때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를 접했다”고 믿었더라도, 그 체험 덕분에 내 삶이 훌륭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만 갖고 제가 옳았다고 볼 근거는 없었을 것입니다. (※ 러셀은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청년기에 몇 차례 정서적·지적 각성을 경험한 바 있고 그로 인해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알려져 있음. 그러나 그는 그 체험들을 초월적 존재의 개입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코플스톤: 맞습니다. 단지 좋은 효과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그 초월적 대상이 실제였음을 입증하지는 못할 거예요. 하지만 최소한 그 긍정적 효과는, 그 체험을 진술하는 당신의 성실성과 제정신임을 뒷받침해주지 않겠습니까? (웃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신비가의 체험 해석이나 신학적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게 아닙니다. 저 역시 신비가들이 자기 체험을 해석하거나 표현하는 방식은 충분히 토론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지, 그들의 삶의 열매를 고려하면 그 체험이 완전히 허황된 것은 아닐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러셀: 분명 젊은이들은 위인들의 전기를 읽고 크게 감화받아 인격 수양에 도움을 얻곤 합니다. 그런데 그 위인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 속 인물일 수도 있지요. 그래도 영향을 받은 그 청년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나오는 리쿠르고스(Lycurgus)를 예로 들어볼까요? 그는 사실 역사적으로 실존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청년이 리쿠르고스가 실재했다고 믿고 그의 일화를 읽으며 깊이 감명받았다면, 그는 실존하지도 않은 사람을 흠모한 것이 됩니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사랑하고 동경한 결과로 인격적 성장을 이뤄낸 것이지요.
코플스톤: 저도 동의합니다. 허구의 인물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 경우 무엇이 영향을 준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실재하는 가치”가 그 매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청년의 경우와 신비가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결정적으로, 리쿠르고스에게 감화된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궁극적 실재”를 체험했다고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신비주의자의 주관적 확신과는 결이 다르다는 말이지요. 위인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훌륭한 인물의 삶에 영감을 받았다” 정도이지, “내가 우주의 궁극적 실재와 합일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비가들은 자신의 체험이 그만큼 압도적인 궁극 실재와의 접촉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양자가 동일선상에 있진 않다고 봅니다.
러셀: 제 요지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역사에 등장하는 허구 인물에 빠져드는 경우를 보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청년이 리쿠르고스를 실존인물이라 믿고 사랑하게 되는 상황을 가정했습니다. 그는 실은 유령 같은 존재를 사랑한 것인데도, 본인은 실재 인물을 사랑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코플스톤: 그 점은 일면 사실입니다. 한편으로 그 청년은 유령, 곧 실체 없는 허상을 사랑한 셈이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 청년이 사랑한 것은 “허상 그 자체”라기보다 그 허상을 통해 표상된 어떤 가치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실재하지 않는 X나 Y 인물을 사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허구 인물이 체현한 어떤 이상적인 가치를 사랑한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 청년은 가짜 영웅을 통해 실재하는 가치를 본 것이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지요.
러셀: (앞서 이야기한) 소설 속 인물의 경우와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코플스톤: 예, 한 측면에서는 그 청년이 허깨비를 사랑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가 실재한다고 믿은 인물을 통해 객관적으로 가치있는 무엇을 사랑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토론 끝, 분석은 다음 편에 계속)
https://youtu.be/wMsbD1L5IlQ?si=9UszR1WkZRFYu5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