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걸음이 빠르다. 함께 걸으면 숨이 차다는 이들이 제법 있었는데도, 나는 그들을 배려하기보다는 걸음이 빨라 목적지까지 이내 도착하는 나라는 인간의 효율성에 내심 만족하며 살았다.
내 걸음은 내 삶을 반영했다. 나는 매사에 효율을 중시하는 인간이었다. 벼락치기하는 수험생 마냥 늘 많은 양의 일들을 서둘러 해치웠고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해내고는 뿌듯해했다.
그런데 서른을 넘기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나는 더 이상 타인을 제치며 빨리 걷는 나를 좋아하지 못했다. 아이는 엄마의 빠른 걸음에 맞춰주지 않았다. 내가 아이의 걸음마에 전적으로 맞춰주는 것이 온당했다. 나를 배려해주지는 않으면서 나의 배려만 바라는 이 기울어진 관계의 함정은 내가 아이를 온 마음과 몸을 바쳐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아이로 인해 나는 달라졌다.
아이와 함께인 세상에서 과거의 나는 그닥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나를 바꾸고자 했고, 그런 나의 의지가 없었다고 한들 나는 바뀔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를 들춰안고 걸어가다보니 나의 속도는 자연히 무게만큼 느릿해졌다. 그런데 덕분에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열렸고, 그 세상의 미학을 온종일 탐색했다. 그러길 몇 년.
나는 삶의 터전을 도시에서 시골로 옮겼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어쨌든 이곳까지 온 젊은 부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이유는 똑같았다.
"아이 때문에"
"아이를 위해서"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결국 생각해보면 나를 위해서 한 선택에 가까웠다.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로 과거의 세상을 살아가기란 힘들었다. 틀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는 내가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오붓한 마당이 있는 작은 전원주택.
창을 열면 구수한 소똥 냄새가 저 멀리서 들어오기도 하는 진짜 시골.
한 번도 본 적 없는 온갖 벌레들에 익숙해지는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 없던 숲 속의 작은 마을.
그곳에서 반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고 있고, 한동안 이곳에 머물 예정이다.
아이도 좋고 나도 좋다. 천천히 느리게, 우리의 속도에 맞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과거와 별 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 문득 우리가 자주 평온하고 자주 느긋해진다고 깨닫는다.
그럴 때 잽싸게 뛰어가 원하는 것을 낚아채던 삶의 카타르시스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황홀감이 찾아온다.
이곳에 와 머문 지 수주가 지났을 무렵,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늘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나무 그늘 아래 멍 때리고 살아가는 것 같아.
내가 나를 보채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참 좋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노동을 하고 노동의 결실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노동의 양과 질이 도시와는 확연히 달라졌고, 당연히 삶 전반의 질과 방향성이 뒤바뀌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됐는지, 조금 구체적으로 글을 써볼까 한다. 느긋하게 쓸 작정이니 언제 다음 편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