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세찬 장맛비가 내렸다.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에 앉았다. 아버지 살아생전엔 하지 못했던 말들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갔다. 365일 중 오롯이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는 하루, 아버지 기일이었다. 금세 A4 용지가 꽉 찼다. 편지를 접어 핸드백에 넣은 후 까만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동작동으로 향하는 자동차 앞 유리에 비가 내리쳤다. 와이퍼가 숨 가쁘게 좌우로 움직였다. 차들은 조심스레 거북이걸음을 했고 다행히 평일이라 올림픽 도로는 한산했다. 맥문동 꽃대가 하늘을 향하는 계절에 친정아버지는 소천했다.
동작동 국립현충원 정문으로 들어서니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십 미터가 넘는 화강암 분수는 역동적인 군인과 애국지사들의 청동조형물이 더해져 인상적이었다. 초소의 헌병이 남편이 운전하는 우리 차를 향해 거수경례했다. 분수대를 돌아 왼쪽에 있는 만남의 광장에 차를 세우고 화원에서 흰 국화를 샀다. 서늘한 꽃향을 맡으며 꽃다발 비닐 안쪽에 준비해 간 편지를 넣었다. 현충문을 뒤로하고 묘역 위 쪽에 있는 충혼당으로 올라갔다. 집에서 삼십 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일 년에 두세 번 올뿐. 코로나 여파로 제례동은 한산했고 출입구에서 신상정보를 적고 손 소독을 해야만 했다.
현충원의 사계절을 찍은 사진들이 걸려있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납골당의 밀폐된 특이한 냄새가 스며들어왔다. 봉안동 213호.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켰다. “딸깍”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며 벽면을 가득 채운 유골함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쪽 맨 아래 칸에 위치한 아버지의 유골단지 옆에는 엄마의 것도 나란히 있다. 두 분의 증명사진 밑에는 육군 대령 손ㅇㅇ, 출생 연도와 6.25 참전, 화랑무공 훈장의 약력과 자손들의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 앞에 꽃을 내려놓고 머리 숙여 짧은 기도를 했다.
십여 년 전, 여름휴가 첫날 아침에도 굵은 비가 내렸다. 아버지는 나의 휴가를 손꼽아 기다렸다. 딸이 오래 병원에 머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입대한 아들의 전화가 있었기에 우체국으로 먼저 달려갔다. 5호 소포 상자에 부탁한 퀸 시디와 해리포터 시리즈 그리고 달달한 간식을 가득 담았다. 좋아할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강원도 양구 부대 주소를 급히 적었다. 아들이 우선이었다. 빗길을 달려갔지만 평소보다 늦었다.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엘리베이터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병실에 들어서자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기다리던 아버지는 왜 이리 늦었냐며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간병인은 끊임없이 나오는 아버지의 가래를 휴지로 받아내고 있었다. 노련한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가 밤새 소변을 못 봤고 손톱 색이 검어졌다고 전했다. 나도 왠지 위중한 생각이 들어 담당의사를 찾아갔으나 원론적인 이야기뿐이었다.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들을 부르라셨다. 그러나 난 월요일 오전 회의로 바쁠 동생들을 생각하며 대기하라고만 전했다. 이미 지난 토요일에도 모였었고 아버지는 유언을 담은 겸손한 기도를 하신 후였으니까. 이것이 가야 할 때를 정확히 느끼고 있던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 될 줄이야.
잠시 뒤 군대 동기 몇 분이 문병을 왔다. 누군지 알아보겠냐는 나의 말에 침대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큰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말하다 갑자기 호흡이 막혔고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심전도 계기판이 “삐” 소리를 내며 0을 가리켰다. 달려온 담당의사는 사망을 확인하며 아버지의 눈을 감겼다. 내게 큰 나무와 같았던 아버지 얼굴이 이상하게 작아 보였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목사님은 흐느끼며 형님의 영혼을 받아달라고 기도했다.
매사에 철저했고 건강했던 아버지, 뜻밖의 폐암 말기 진단에 가족들은 당황했다. 수술도 할 수 없고 항암도 효과가 없었다. 머리칼은 빠지고 몇 개월 만에 병색이 완연했다. 대학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 말했다. 자식들은 부모를 살뜰히 살피기엔 직장생활과 어린 자녀를 돌보느라 바빴고 평소 부정맥을 앓았던 엄마는 밤새며 아버지 간호하기엔 무리였다. 엄마까지 뇌출혈로 쓰러졌다. 연이어 일어난 사건 앞에서 나는 더욱 강해져야만 했다. 자식들의 노력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황망히 한 해에 함께 하늘로 떠났다. 마치 천생연분처럼.
아버지의 열 번째 추도식을 외롭게 치르고 바다로 향했다. 장사항, 속초에 있는 조용한 포구였다. 지인 덕분에 찾은 펜션 5층 방은 전망이 좋았다. 얼마 만에 보는 넓디넓은 바다였나. 침대에 편히 누워서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는 호사를 누렸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티브이에서는 노란 우비를 입고 안전모를 쓴 기자들이 하루 종일 수해상황과 수재민 그리고 사상자들의 소식을 바삐 전하고 있었다. 습한 바닷바람과 시끄러운 파도소리는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랜 세월 내 맘 속에 응어리진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코로나19로 형제들과 추도식도 다 같이 하지 못한 속상함도 있었나 보다. 출렁이는 파도는 끝없이 해안으로 하얀 거품을 내며 밀려왔고 바다는 먼 수평선으로 희미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그 흐릿한 선은 멀리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마치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듯이.
예기치 못한 암 앞에서 짧은 시간에 삶을 정리하고 이별을 준비하느라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몇 개월 동안 지독한 통증을 견뎌내야 하는 환자의 삶과 당신을 간병하다 쓰러져 중환자실에 있을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수십 년 함께 했던 아내와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하는 아픔을 어찌 견뎌내셨을까. 육체의 아픔과 정신적인 당혹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통과했을지. 그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딸로서 책임에만 바빴으니 아버지의 고통은 철저히 혼자만의 것이었으리라.
전형적인 직업군인이었고 감정표현을 안 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아버지, 나 또한 그렇게 자랐다. 병실을 나올 땐 아버지 손을 잡고 말했었다. “아버지, 이 밤도 힘든 전쟁 잘하시고 꼭 이기세요.” 고개를 끄덕이던 야윈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금만 있으면 휴가예요. 조금만…” 그 말은 지친 나 자신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으리라. 일주일의 여름휴가는 아버지의 장례일정으로 채워졌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이제야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하며 미안함에 가슴이 저며온다.
2박 3일 계속되는 빗속에서 동해의 망망대해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검푸른 파도에 못다 한 회한을 씻고 싶었다. 부모님을 간병했던 일 년의 세월은 이제 아팠던 만큼 인생의 진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짙은 먹구름에 소나기가 퍼부었고 높은 파도가 치던 시간들, 앞을 볼 수 없는 기다림의 초조한 순간들. 예정된 이별의 그 길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잘 모르던 나에게 인간은 다 유한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하늘이 부르는 순간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고 내가 꽉 쥐고 있는 것들이 정녕 진짜인지를 분별해야만 한다는 사실 앞에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평안한 아버지 유언이 생각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과 감사로 맺었던 작은 목소리가. 나도 그리될 수 있기를.
서울로 돌아오는 길, 비가 그치고 변덕스러운 회색 구름 사이로 간간히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