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과 침묵 그리고 생존
-샐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 리뷰에세이
“참 볼품없는 남자였다. 적어도 첫눈엔 그랬다.” 소설은 단문으로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이 평범한 만남으로 열일곱 살의 백인 소녀 빅토리아의 인생은 급류를 타게 된다. 그녀는 까마귀 날개만큼이나 새카맣게 빛나던 이 이방인 남자와 눈을 마주친 첫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 눈에 담긴 다정함이었다고 고백한다. “마치 상냥함이 넘쳐흐르는 우물이 있을 것만 같은 눈이었다.”라고. 과연 어떤 눈이 길래 그리도 끌렸을까 생각하며 나도 친할아버지 댁 뒤뜰에 있던 깊고 고요한 우물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남자는 마을 사람들이 혐오하는 갈색 피부의 인디언, 윌슨 문으로 밝혀졌고 그들의 사랑은 용납될 수 없었다. 강렬한 끌림에 빅토리아는 여자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사랑을 할 수 있다 말해줄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한다. 그녀는 긴 시간 아픈 사랑의 비밀을 간직하고 ‘흐르는 강물처럼’처럼 아무리 느리더라도,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아무리 적은 양이어도 어떻게든 물길을 꾸준히 찾아내 흐르며 삶을 이어간다. 나 또한 이 소설을 통해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 내 인생의 긴 강물이 어떻게 굽이쳐 돌아서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되돌아보면서...
미국 작가인 샐리 리드는 소녀에서 사십 대 여성으로 성장하는 빅토리아의 눈을 통해 미국의 원죄와도 같은 민감한 인디언 문제를 직시한다. 서부개척시대를 거쳐 지금은 자신들의 땅이 되었지만 원래는 그 땅의 주인이었던 쫓겨난 원주민 인디언들의 아픔을 보듬는다. 소설의 주인공 윌슨 문도 콜로라도 로키 산맥 주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원주민인 유트족으로 그렸다. 그의 가족들은 한꺼번에 죽음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이유는 생략했지만 19세기 금광과 탄광이 발견되면서 백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게 되자 인디언부족들과 충돌이 심화되었다는 것을, 미국인들 마저도 지탄했던 무고한 여자와 아이들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는 것을, 살아남은 소수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야만 하는 그들의 처지를 쉽게 추측한다. 마을 주민들과 아버지와 동생 세스의 입을 통해 인디언들을 향한 적개심과 거기서 비롯된 맹목적인 편견과 혐오가 거침없이 나온다. 흐르는 물처럼 살려고 했던 윌은 빅토리아를 사랑했기에 짧은 생애를 마치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사람들의 편견과 혐오는 증오를, 증오는 죽음의 악순환을 불러오는 것이리라.
미국의 서부 확장의 역사는 원주민들에게는 물리적 문화적인 제노사이드를 행할 수밖에 없었다. 난 그녀가 이 책을 통해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인디언들에게 행했던 그 학살을 사죄하고 애도하는 것만 같았다. 소설은 윌과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들 루카스를 통해서 열린 결말로 여운을 남긴다. 거기에서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아름다움과 창창한 미래를 앗아가는 세계 2차 대전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그 시대의 아픔을 담아 이야기를 끌고 간다. 전쟁이 인간에게 무엇을 빼앗아 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또한 고향인 콜로라도 아이올라에 정부에서 댐을 만들면서 마을이 수몰되는 역사적인 사건도 커다란 축을 이룬다. 이 소설의 목차 또한 특이하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아라비아 숫자인 연도로만 구분해 5부로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과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에 작품을 쓴 그녀를 보면서 그 의도를 생각해 본다. 독자의 입장에서 또 한편으로는 작가의 입장에서 과연 난 샐리 리드가 작품 속에서 나타내고자 한 것을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한국 작가들이 소설을 쓴다면 과연 어떤 역사의식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써야 할 지도 고심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란 말도 떠올려 본다.
독서로 얻게 되는 소중한 것 중 하나는 나 자신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 이 소설을 통해서도 인종적인 편견, 루비앨리스란 마녀처럼 취급되던 개인에 대한 따돌림, 미혼모와 입양아에 대한 비하 등 이 소설의 모든 문제가 내 안에도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살아온 삶의 시간만큼이나 고정관념의 나이테가 빽빽한 나를, 사회 속에 자리 잡은 편견의 숲도. 그동안 나의 삶도 주인공 빅토리아만큼이나 조용히 순응하며 살아왔다. 개인적, 사회적 견고한 차별의 벽과 관습에도 침묵했고 소리 내지 않으며 그런 나를 합리화했다. 소설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감리교 목사도 신실한 신앙인인 엄마조차도 가족을 잃은 충격에 정신이 이상한 루비앨리스를 멀리하며 심지어는 그녀에게 돌팔매질하는 아들 세스의 행동도 만류하지 않는다. 샐리 리드는 그런 나에게 보란 듯이 예리한 작가의 눈으로 가정과 사회의 여러 가지 편견과 문제들을 이 소설에서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 소설의 문장은 강물의 윤슬처럼 반짝이고 서정적이나 이런 날카로운 메시지에 내 마음의 강물은 큰 돌덩이를 맞은 듯 흔들렸다.
웨스턴콜로라도대학교에서 삼십여 년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친 샐리 리드는 환경 및 지속가능성에 대한 전공과목을 창설했단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문장들은 자연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고 매혹적인 통찰력을 보여준다. 윌의 아이를 임신한 빅토리아가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 홀로 산막에서 아이를 낳으려 숨어 있을 때 “거대하고 신비로운 테피스트리로 장식된 숲 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면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라는 표현이라든지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이 같은 문장은 자연과 생활하면서 깊은 교감을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이 깊은 사색이 들어 있었다. 켜켜이 쌓여 썩어가는 시간의 냄새가 나는 듯한 문장들. 빅토리아는 복숭아 과수원을 하던 수몰된 자신의 집과 고향을 보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삶이라고 불러온 이 여정도 잠겨버린 이 강물과 비슷하지 않은가. 저수지로 만들어 놓았는데도 온갖 걸림돌과 댐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고 흐르는 이 강물,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 그저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가지고 계속 흘러가는 이 강물은 내 삶과 같았다고.”
이 책에는 절절한 사랑과 안타까운 모성과 온갖 역경에도 그것을 통과하는 여인의 강인함의 사연이 콜로라도의 깊은 산과 유유히 흐르는 거니언 강물에 담겨 흐른다. 모든 것들이 다 낡고 사라지지만 그녀의 이 생명력의 원천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산다는 것은 내가 처음 제목을 듣고 속단했던 모호하고 순응적인 체념으로 이해됐던 뜻이 절대 아니었다. 강물은 어떤 걸림돌도 무릅쓰며 멈추지 않고 흘러서, 그리고 각각의 개울들이 모여 강을 이루듯 나와 다른 존재를 이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으니까. 최적의 선택을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도달해 있는 것이란 말에 나 또한 공감한다. 비록 나와 남편은 열정적인 끌림은 없었을지라도 지금껏 함께 이어져 인생 여정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토닥여주어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