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인 질문 두 가지

-제5도살장(커트 보니것, 문학동네, 2020)

by 가을장미



제목이 심상치 않았다. 도살장이라니! 역시나 참혹한 죽음이 가득했다. 미국인 작가 커트 보니것(1922년~2007년)의 이 소설 제목은 실제로 가축도살장을 개조해 만들었던 독일의 포로수용소 이름이었다. 20대 초반이었던 작가는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미군 보병으로 징집되어 유럽의 전선으로 보내졌다가 전쟁 포로가 된다. 그 후 자신이 겪은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을 소설로 다루고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이 유럽사 최대의 학살이라 여겼다. 당시 독일의 드레스덴은 국제법으로 보호받는 비무장도시였고, 군수산업도 이렇다 할 규모의 병력이 모여 있지도 않은 곳으로 도시의 주요 산업은 제약과 식품 가공과 담배 제조였단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전투기들은 전쟁 말기에 대규모의 포탄을 3일 동안 쏟아부어,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보다 사상자가 많았다고. 마침 지하 고기저장소에 있었기에 살 수 있었던 주인공 빌리의 말을 빌리면 완전히 파괴된 드레스덴은 마치 생물이 살지 않는 달 표면 같았다고. 오랫동안 미국에서도 이 사실은 비밀로 했다며 작가는 이 역사적 사건을 소설로 쓰기 위해 이십여 년이 걸린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중에 이 소설을 출간했는데 그 후 반전 소설로 유명해졌다. 난 이 책이 작가의 양심선언 같았다.

그는 풍자, 블랙코미디와 공상 과학의 장르를 한데 엮고 삽화를 곁들이는 작가로 유명했다. 이 소설도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오가며 시간여행을 하는 액자소설의 구조다. 하지만 읽을수록 웃펐다. 요즘 표현으로 웃음이 나면서도 슬픈 느낌. 블랙유머가 가득했기에 죽음이 난무하는 문장들 속에서도 분위기가 무겁지만은 않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뭐 그런 거지.”( So it goes.) 무려 106번이나 나왔단다. 세어 볼 수는 없었지만 어떤 죽음이 나온 후엔 어김없이 이 문장이 뒤따랐다. 예를 들면 소설의 시작 장면, 전쟁이 끝난 후 화자와 옛 전우 오헤어를 태워 드레스덴으로 데려다준 택시 운전사를 설명하면서 처음 이 말이 나왔다. ‘그의 어머니(택시 운전사)는 드레스덴 폭격의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버렸다. 뭐 그런 거지.’ 마지막으로는 늙은 고등학교 선생 출신의 미군 에드거 더비가 지하묘지에서 찻주전자를 가져왔다가 들켜 약탈죄로 체포되었을 때다. ‘재판을 받고 총살을 당했다. 뭐 그런 거지.’라고. 하지만 이 문장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빌리의 방 벽에 걸린 그리스도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는 끔찍하게 죽었다’란 문장 뒤에도, ‘그들은 소설이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뒤에도, 가축과 나무 같이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총망라해서 어김없이 꼭 나왔다.

왜 작가는 이렇게 체념적 수동성을 대변하는 듯한 이 문장을 이다지도 많이 썼을까. 내게 와닿은 가장 비극의 문장은 ‘초와 비누는 유대인과 집시와 동성애자와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국가의 적들을 녹여 만든 것이었다. 뭐 그런 거지.’와 ‘시체 광산이 수백 개 생겨났다. 뭐 그런 거지’ 같은 문장들로 전쟁의 냄새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을 통해 작가는 다양한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죽음에 대한 묵상을 해보라는 것이었을까?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의문인 죽음의 문제를. 이 문장은 주로 주인공 빌리가 내뱉는 말이었다. 그는 독일 전선에 파병된 미 군종병이었다. 하지만 어느 편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런 허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또한 그 말은 빌리가 잡혀갔던 행성의 트랄파마도어인의 죽음과 시간에 대한 관념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정신을 차리며 읽어야 했다. 그래야만 시공을 넘나드는 이야기의 퍼즐이 맞춰지니까. 하지만 작가는 친절하게 반복하며 자신의 목적지로 인도했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지구인과는 다른 죽음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우리가 쭉 뻗은 로키산맥을 한눈에 보듯이 모든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그래서 주검을 볼 때 죽은 사람이 그 특정한 순간에만 나쁜 상태에 처했으며, 다른 많은 순간에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처럼 빌리도 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뭐 그런 거지.’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모든 순간이 다 영원하다니... SF소설답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내겐 묵직한 무게로 다가왔다. 작가는 그와 같은 형식을 빌려서 자신이 경험한 역사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으리라.

이 소설에서 인상 깊은 질문이 또 하나 나온다. 누구나 좋은 상황에서는 절대 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 나죠?” 인정하고 싶지 않고 투정과 남 탓을 하고 싶을 때 되묻는 말. 빌리도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비행접시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워졌을 때 이 질문을 한다. 외계인은 정말 지구인다운 질문이라며 “왜 당신이냐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우리여야 할까요? 왜 뭐여야 할까요? 그냥 이 순간이기 때문이라고 호박(琥珀)에 들어 있는 벌레처럼 이 순간이라는 호박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여기에는 어떤 왜도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왜 나죠?” 이 물음은 나도 수없이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삶과 생명을 준 절대자와 부모에게. 아마도 한계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직면하며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아닐까. 처음엔 부정하지만 그 질문 이후에야 인정하고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갈 길을 향해 가지 않았는지. 지금도 가끔 투정을 한다. “왜 나죠?”라고. 하지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잃었던 길을 찾게 하는 물음이 되곤 한다. 질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는 그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질문이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나 또한 위로를 받으며.

상상력이 가득한 작가도 아마 이 소설의 개요를 짜면서 고심이 많았으리라. 등장인물 중 가장 살아남을 확률이 적었던 빌리가 살고, 가장 가능성이 큰 에드거 더비가 어처구니없이 죽는 부조리와 아이러니, 그는 전형적인 영웅 소설을 전복시켰다. 그래서일까, 기존의 모더니즘을 해체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즉 반문화적인 소설이란 평을 듣는다. 또 종교에 대한 비판과 심지어는 빌리를 아기예수에 비견하기도 하고 십자군 전쟁의 비판 등으로 반기독교적이며 성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과 묘사로 비도덕적이란 공격을 당했단다. 비록 20세기 100대 영문소설에 포함되는 영광도 얻었지만 청소년에게 유해한 소설이란 취급을 받기도 했다니 시대를 앞 선 작가의 운명이 아닐까. 대파괴, 대학살이란 전쟁을 되돌아보며 과연 인간의 존엄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작가의 역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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