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현관 자동문 너머로 침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낯익은 간병인이 바퀴달린 침대를 밀며 오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가슴까지 분홍색 담요를 덮은 채 누워 있었고 마스크가 작은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편은 유리문에 더 가까이 다가서며 마스크를 벗고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양주에 위치한 요양병원 출입문 앞에서 4개월만의 면회였다. 코로나19로 면회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마치 이산가족 상봉과 같았다.
시어머니는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해 이곳에 온 지 십여 년이 되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뒤 아들들은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적응하지 못 해 집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대소변을 받아내야하는 그녀를 전적으로 돌볼 자식은 아무도 없었다. 남편과 자식에게 올인하며 살았을 인생. 그러나 홀로 요양원에서의 노년은 엄마라는 이름에 힘겹게 살아왔을 그녀에게 냉혹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끝을 향한 기다림만이 있을 뿐.
얼마 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임시 면회소에서 만남이 가능하다고.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한 남편과 나는 현관에서 손소독제를 바르고 벨을 눌렀다. 방문자는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이름표를 목에 건 커트머리의 젊은 여직원이 나왔다. 발열체크를 하고 내미는 용지에 체온과 신상을 적었다. 기다리는 동안 병원 건물 밖으로 시선이 갔다. 주차장 왼쪽에는 구급차 한 대가 놓여있었고 방문차는 서너 대뿐 한적했다. 오른쪽엔 임시면회소라고 쓰인 흰 텐트만 덩그러니 설치되어 있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요양병원은 축령산의 맑은 공기와 흔들리는 나뭇잎 속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 건너편 숲은 따스한 햇살에 빛났다. 노랑과 연두 그리고 초록색의 나뭇잎들이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비슷하나 자세히 보면 너무나 다양한 초록의 색들. 산은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에 한가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공기 좋은 축령산 그러나 외딴 곳에서 어머니는 코로나로 지난 몇 개월동안 아들 중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가운데 어떻게 지냈을지.
휠체어가 아닌 침대에 누워 마스크를 쓴 어머니의 얼굴은 더 작아보였고 회색의 머리칼은 짧아져있었다. 유리문 앞에 다가온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유리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제서야 눈을 깜박거리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할말이 많다고, 유리문을 열어 달라고 간병인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침대 옆에 간병인은 아직 위험해 안 된다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 마스크 속에서 맴도는 어머니의 말소리는 어눌하고 작아 들리지 않았다. 막상 아들 며느리에게 할 말이 있냐고 젊은 여직원이 물으니 우물쭈물 속 이야기를 못했다. 간병인은 어머니가 식사도 잘하고 상태가 좋다고 했다.
처음엔 자주 문병 가자던 남편도 거의 십 년이 되어가니 안달하지 않는다. 긴 병에 효자없다는 듯. 말없는 남편은 면회와서 몇 마디 안부를 주고 받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점심 식사가 나오면 떠 먹여드리고 켜놓은 TV 소리만 병실에 가득찬다. 나는 어머니께 핸드폰에 저장된 계절마다 찍은 많은 사진들을 보여준다. 특히 꽃사진을. 그러면 어머니는 화면을 만지며 “곱다, 예쁘다”며 한참을 쳐다보았다. 어지러울 때까지. 좋아하는 어머니 모습에 더 많은 사진을 찍었다. 요양원 밖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얼굴 중 이 순간은 어머니의 밝은 웃음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때였으니까.
몇 년 전까지만해도 시동생네가 준비한 스케치북에 매일 몇 장씩 마비되지 않은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주로 자신의 어린시절 추억과 다섯 아들 키우던 젊은 시절 모습이었다. 크레파스로 색칠하던 어머니는 화가의 모습이었고 총기는 대단했다. 간호사나 주변에 그 그림을 선물하곤 했는데 지금은 눈도 잘 안 보이고 손에 힘도 없어져 작년부터는 크레파스도 사물함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가끔 돌아가신 남편이 꿈에 보인다며 빨리 데려가라는 말만 하시곤.
가끔 병실에서 어머니 손을 수건으로 닦았다. 수건을 빨아 널 때면 침대모서리에 적힌 어머니 나이가 보였다. 백 세를 바라보고 매년 한 살씩 더해지는 숫자. 어머니는 오래 사는 것이 미안한 듯 여기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다고했다 십여 년이 지나니 이젠 더 나이 많은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요양병원에서의 생활이 며느리와 아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생각에 어머니의 자책은 또 얼마나 클지.
두 해 전, 큰 아주버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매주 금요일이면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했었는데... 어머니는 왜 큰애가 전화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냐고 계속 물어보았다. 막내 시동생이 난처해 했다. 그는 병원 가까운 곳에 살며 매주 한 번씩 엄마를 찾아가는 효자였다. 형의 장례가 끝난 후 거짓말로 버티다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말은 아들 직장이 있는 따뜻한 인도네사아로 요양차 갔다고, 남편에게도 그렇게 하자고했다. 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친 듯 이제는 물어보지 않는다. 찾아오지 않는 큰 아들에 대해 무언가 느낀 것만 같았다.
십 여년 세월 속에 요양원 오는 길도 좋아지고 주변은 많이 바뀌었다. 그 시간의 흐름속에 자식도 앞세우고 그것도 모르고 계신 어머니. 남의 손에 모든 것을 의존하며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침대를 벗어날 수 없는 생활. 이젠 의식도 흐려지고 모든 것이 안개 속 같을 지도 모르겠다. 가끔 얼굴 비치는 아들과 며느리와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에 아쉬워 눈물짓고. 이런 하루가 어떤 의미가 있나 생각하는 나의 마음도 편치 않다. 하지만 노년의 삶이란 누구에게나 어찌 할 수 없이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벗어날 수 있기에. 몇 년 전부터 남편은 헤어질 땐 외로운 어머니를 지켜달라고 손모아 기도하며 병실을 나온다.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이기에.
이번 만남에 어머니의 목소리는 작고 어눌해 간병인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몇 번씩 말해야 하니 시간은 너무 짧았다. 꽃사진도, 기도도 잊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스크를 쓴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뿐. 간병인에게 식혜와 쌀 튀밥을 전해주자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쉬움에 마비되지 않은 야윈 오른손을 계속 흔들며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우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침대가 들어갈 때 까지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었고.
그동안 못한 면회를 했기에 책임감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졌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남편 또한 말은 없었지만 이제는 애틋한 마음은 희석된 듯하다. 이렇게 십여 년의 시간은 많은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별의 시간도. 어머니의 노년 긴 병상을 지켜 보며 생각한다. 나도 어머니처럼 결혼과 직장생활을 하며 자식이 홀로서기 하도록 수고하는 그 책임을 하고있다. 며느리인 내가 알지 못했던 젊은 시절 시어머니의 노동과 자식을 키우며 겪었을 같은 아픔을 인정하고 귀히 대접할 수 있게 되기를.
어머니의 입을 덮고 있는 마스크, 어머니는 못다한 어떤 말을 더 하고싶었을까. 얼마나 하지 못한 말들이 많을까. 지금 남편과 나의 가정이 어머니의 거친 삶 덕분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늙고 병들어 외로운 어머니를 며느리의 눈이 아닌 딸의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인생도 별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시어머니의 지난 인생이 소중했고, 살아있는 오늘 하루도 자신을 귀히 여기며, 마지막까지 잘 견디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