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 우리 집은 경기도 포천으로 이사했다. 직업군인인 아버지의 새 발령지였다. 몇 년간 살던 진해를 떠나야만 했다. 해가 지도록 친구들과 노느라 아버지께 기합을 받기도 했던 정든 곳을.
관사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좁은 평지에 슬레이트 집만 달랑 몇 채 있었다. 관사를 지키는 당번 아저씨뿐 내 또래 아이들은 없었다. 집에서 내려다보면 구불거리는 좁은 찻길에 간혹 산골 작은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지나갔고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의 훈련 행렬과 군용 트럭 그리고 지프차가 보이곤 했다. 그 길 건너편으론 제법 큰 개울이 흘렀고 멀리 시멘트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교 후 버스에서 내려 언덕길을 올라갈 땐 나도 모르게 “아빠하고 나하고…”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흥얼거렸다.
적막한 관사의 생활도 낯선 학교와 공부도 매일 보는 아버지의 국방색 군복처럼 익숙해져 갔다. 동생들 말고는 친구가 없었기에 봄이 되자 앞마당 귀퉁이에 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땅을 파고 흙을 고른 후 씨를 뿌렸다. 흙냄새를 맡으면서. 꽃밭 주위에는 벽돌을 모아 둘렀다. 정성껏 물을 주고 아침마다 쳐다보니 어느덧 꽃밭은 동요 가사와 똑같아졌다.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그 꽃들 뒤로는 아침이면 해바라기를 감으며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고 오후엔 분꽃이 활짝 웃었다. 꽃밭은 나의 친구가 됐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사꾼의 팔 남매 맏이로 살 길을 찾아 군에 들어갔단다. 참한 처자가 있다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고향에 와서야 이웃마을 처녀인 엄마를 처음 보고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귀대한 남편을 기다리며 엄마는 고된 시집살이 육 년 만에야 나를 낳았다. 사과 궤짝에 냄비와 수저 두 개로 아버지의 발령지를 옮겨 다녔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내가 태어나서야 아버지의 바람기는 잦아들었고 그 후 엄마는 아들 둘을 더 낳았다. 비록 배움은 짧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다잡아 가정에 눌러 앉힌 당찬 여자였다.
언젠가 아버지는 우리 식구를 데리고 계곡에 갔다. 맑은 물가의 돌을 들어 올리면 가재가 등을 구부린 채 숨어 있었고 작은 물고기가 재빠르게 헤엄쳤다. 겨울엔 꽁꽁 언 저수지에서 스케이트도 가르쳐 주었다. 배운 대로 무릎을 굽히고 비틀거리며 안간힘을 쓰다 보면 땀이 났고 추운 줄도 몰랐다. 비록 뒤꿈치는 까져서 피가 나고 넘어져 멍이 들었어도. 집에서 목욕하기 힘든 추운 날에는 시내 목욕탕에 갔다. 지프차 뒤에 타고 다니면 아버지를 보고 ‘충성’ 경례하는 군인들의 모습에 덩달아 나도 우쭐하는 기분도 들면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먹는 자장면 맛이란. 엄마의 때밀이 수건의 따가움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아침엔 관사로 운전병 아저씨가 지프차를 몰고 왔다. 아버지는 현관 마루에 앉아 불편한 군화를 끈을 조여매고 회색 지휘봉을 들었다. 무궁화 계급장이 빛나는 모자를 눌러쓴 아버지는 차에 올랐다. 그럴 때면 당번 아저씨의 경례 소리와 우리 형제의 인사 소리가 우렁찼다. 지프차는 소리를 내며 언덕을 내려갔다. 아버지가 부대로 가고 떠나고 난 후 방학 땐 특히 하루가 길고 길었다. 숲에서 산딸기를 따먹고 우리 집에서 키웠던 똥개, 누렁이와 놀았어도.
어느 날, 퇴근한 아버지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TV 광고에서 보고 조르고 졸랐던 것이었다. 난 그 선물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방바닥이 꺼져라 겅중겅중 뛰고 또 뛰었고 나를 쳐다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어깨동무‘, 난생처음 받아 본 어린이 잡지였다. 그 후 엄마는 세계명작동화와 위인전집을 차례로 사주었다. 배움이 짧은 자신보다는 잘 살기를 바라면서. 외로웠기에 금방 책과 친해졌으리라. 하이디와 소공녀 그리고 작은 아씨들을 읽고 또 읽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마치 내가 ’ 하이디‘가 되고 ‘세라’가 된 듯 상상하면서.
몇 년 후 우리 가족은 서울 변두리로 또 이사를 갔다. 중고등학교에 가면서 점점 더 교과서만 가까이해야 했기에 다른 책들과는 멀어졌다. 이사 다니지 않아도 되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우리 아이들은 태어난 동네에서 쭉 자라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잦은 이사가 나의 결핍이라 생각했지만, 아파트 외에는 모르는 아이들이 좋은 것일까. 장미꽃 말고는 아는 꽃 이름이 거의 없는 아이들로 키웠다. 왜 소중한 것은 시간이 지나야 만 알까. 중년이 되어서까지 가끔 송사리가 헤엄치는 맑은 시냇물이 꿈속에 나왔다. 그런 날은 몸도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산골에서 살았고 또 적적했기에 그곳에서 책을 가까이할 수 있어 그나마 내 정서가 키워진 것은 아닐까. 그 후 입시와 경쟁 사회에서 앞만 보며 살았지만 그래도 이만한 것이.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요즘, 친구가 없어 쓸쓸했던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이젠 다시 마음의 꽃밭에 물을 주며 가꾸리라. 소중한 만남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