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아, 드디어 가을이네. 커트머리의 앳된 여중생과 교생으로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내와 엄마 그리고 며느리의 역할을 하느라 자주 만나지도 못했지. 가끔 걸려오는 네 안부 전화가 얼마나 반갑고도 미안하던지. 언니인 내가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했어.
모처럼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가을 때문인 듯해. 높고도 푸른 하늘을 보니 몇 년 전 관광버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어. 회사 야유회로 충청도에 있는 청남대에 다녀오는 도중이었단다. 토요일 아침에 일찍 서둘러 차에 올랐고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에서 몇 시간 산책하며 가을 단풍의 매력에 푹 빠졌었지. 거기다 맛난 식사까지 했기에 돌아오는 길엔 몸도 마음도 노곤했어. 그때였지. 국장님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트로트를 한 곡 뽑으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어. 동료들도 마이크가 돌아가면 다들 빼지 않고 한 곡씩 부르는 거야, 신명 나게. 노래에 자신이 없는 난 그냥 넘어갈까 고민하다 그만 내 차례가 됐지 뭐야. 잠시 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노래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였어. 왜 일까. 아마 하루 종일 본 빨간 단풍과 잔잔한 호수에 비치던 햇살 그리고 국화향이 가득했던 가을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취했기 때문이었던 듯해. 고된 일로 힘들었던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거든. 동료들도 내 노래를 따라 불렀지. 다들 가사를 끝까지 몰라 아는 부분만 반복하는 돌림노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서일까 가을의 문턱에서 편지를 쓰게 됐네.
숙아, 올여름은 몇 년 만의 폭염으로 많이 힘들었지? 직장 다니랴 중학생인 두 딸 챙기랴 편찮으신 시어머니와 친정엄마까지 신경 써야 했으니. 집에 있는 나도 견디기 어려웠단다. 특히 외출조차 편치 않던 때라 집에서만 견뎌야 했으니까. 아침부터 찌는 더위를 참다 참다가는 오후가 돼서야 겨우 에어컨을 켜고 거실 바닥에 누워있곤 했지. 나이 든 애완견은 현관 타일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웠고. 한 여름에 털외투를 입고 있으니 말해 뭐하랴. 그때 실감했어. 추위보다 더위가 더 견디기 어렵고 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게으를 수밖에 없어 시에스타가 꼭 필요한 것을. 그리곤 결심했다. 이 더위가 지나가면 집에만 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계절의 축복을 누려야겠다고.
숙, 이제 아침저녁엔 제법 선선해졌잖아. 그래서 그동안 미뤘던 창덕궁에 갈 결심을 했고 실행에 옮겼단다. 안국역에 도착해 걷다 보니 ‘공간’ 사옥은 여전히 담쟁이덩굴에 감싸여 있더라. 고 김수근이 설계한 멋진 건축사무실이었는데 지금은 미술관으로 바뀌어 마음이 살짝 불편했어. 옆에 있는 거대한 현대 사옥에 가려져 왜소한 모습이 마치 건축설계를 작품으로 여기며 타협하지 않고 어려운 길을 가는 건축가들의 모습 같았어.
관람시간에 맞춰 일찍 도착했지만 벌써 창덕궁 안에는 인정전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지. 창덕궁은 좌우대칭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경복궁과 달리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를 했대. 난 궁궐보다는 후원으로 향했어. 역사를 간직한 고궁의 모습과 몇 백 년의 시간을 견뎠을 고목들의 푸르름을 옆으로 하면서. 드디어 기와로 장식된 돌담길을 걸으며 후원 산책에 들어갔어. 입구는 길을 잘 닦아놓았고 가족이나 친구, 연인끼리 삼삼오오 나들이 온 사람들의 얼굴엔 산책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 나더라. 나도 일행을 따라 언덕길을 걷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첫 번 째 정원을 보고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어.
삼백 평 정도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芙蓉池)를 중심으로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이 걸린 2층 누각이 눈에 들어왔거든. 와, 그 광경이란! 너도 꼭 봐야해. 주합루란 ‘우주와 합일된다 ‘란 뜻 이래. 정조가 규장각 건물로 쓰기 위해 처음 지었고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는 곳으로 쓰였다고 하네. 왕의 큰 뜻이 느껴졌어. 건물 앞에는 수어문(水魚門)이란 작은 문이 있었는데 수어문이란 뜻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그만큼 가까워야 한다는 뜻 이래. 화사한 단청과 붉은색 굵은 나무기둥이 조화를 이뤄 한국적인 목조건물의 아름다움이 느껴졌어. 그리고 건너편에 부용정(芙蓉亭)이란 작은 정자가 정말 마음에 들었단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지붕에 특이하게 두 기둥을 연못에 넣은 채 만들어져 있었단다. 연못의 물을 좀 더 가까이에서 즐기라고 배려한 듯해. 얼마나 단아하게 보이던지 심청이가 임당수에 빠졌을 때 연꽃에 들어간 모습이 이러했을까 싶더라.
부용지는 커다란 연잎으로 가득했어. 연꽃이 피는 봄엔 얼마나 장관일까 싶더라. 연못 한가운데 소나무는 멋진 모습으로 가지를 뒤틀며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용의 모습 같기도 했어.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사에 지친 왕이 된 듯 조용히 이곳저곳을 거닐었어.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었지. 숙이 너와도 여기서 만나면 좋을 듯해. 너의 힘든 마음도 나처럼 좀 옅어지지 않을까. 도심에 이런 푸른 숲이 있고 옛 모습들이 보존돼 있어 꼭 한 번은 같이 와야 할 장소인 것 같아. 가까이 있지만 찾아올 생각을 못한 무심함이 새삼 느껴졌단다.
숙아, 너는 이곳에 와 봤는지 모르겠지만 또 소개할 곳은 애련정(愛蓮亭)이야. 이곳은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이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단다. ’애련정‘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 밖에도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의 접견실 연경당과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이 있어. 가장 깊은 골짜기에는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고 그 수로를 따라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는 옥류천도 있었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너랑 꼭 다시 와서 보여주고 싶어.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서점 주인은 그렇지 않대.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기 좋은 계절이라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어서 그런 캠페인을 했던 것 같다며 웃었어. 요즘은 동네서점에서도 도서관과 연계해 새 책을 공짜로 대여할 수 있어 좋더라. 바쁜 결혼생활 중에도 방통대에 등록해 계속 배워가던 네가 대견했어. 여전히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겠지? 난 이문재 시인의 신작 ‘혼자의 넓이’를 한 권 신청해 받아왔어. 가을은 시가 읽고 싶어지는 계절이기도 한가 봐. 나처럼 건조한 사람도 말이지.
숙아, 며칠 전 통화하면서 너의 요즘 결혼생활이 힘든 마음이 느껴졌어. 시월이 가기 전에 가을 정취를 느끼며 우리의 인생도 같이 나누는 시간을 가지자. 비록 서울의 동쪽과 서쪽 끝에 살아도 중간 지점인 여기 ‘왕의 후원’ 어때? 그동안 못 나눴던 우리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자. 그럼 만날 때까지 건강해. 다시 연락할게.
2021 10월에 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