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가을비가 그치면

by 가을장미

며칠 전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뒷목이 뻣뻣하고 통증이 왔다. 목 상태를 보아하니 병원에 가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울 듯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기도 힘들어질까 봐 집안일을 빨리 끝내고 현관문을 나섰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동네 한의원으로 조심스레 걸어 가면서 한 작가를 떠올렸다. 자신의 묘비명에 ‘작가이자 러너’라고 남기고 싶어 한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가로서의 직업 정신을 알 수 있는 회고 에세이였다. 그는 긴 소설을 쓰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달리기로 몸을 단련했다. 전업작가가 되면서부터는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 아침나절에는 꼭 서너 시간 집중해 글을 쓰고 오후에는 거르지 않고 십 킬로 정도 달리기로 체력을 다졌단다. 스물다섯 번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 울트라마라톤과 트라이애슬론까지 도전한 특이하고 대단한 작가다.

그는 소설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재능이지만 이것은 필요한 자질이라기보다는 전제조건이라 했다. 다음으로는 집중력인데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며 중요한 지속력을 말했다. 집중하며 지속적으로 글을 쓰다 보면 내면의 숨겨진 재능을 꺼낼 수 있다고. 평범한 주자인 자신도 달리기를 통해서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극복해나가며 이겨내야 할 상대는 바로 과거의 자신이었다는 깨달음의 글은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았다. 이 책을 읽을 땐 나도 다짐했었다. 체력의 중요성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꾸준한 산책도 일시적이었을 뿐.

걸어서 몇 분 거리의 단골 한의원에 들어서니 밝은 조명이 산뜻했다. 간호사에게 온 이유를 설명하고 진찰실 문을 열었다. 낯익은 젊은 한의사가 웃으며 맞아주었다. 이번에는 허리가 아니라 목이 불편하 다했더니 몇 가지 목 동작을 시켜보았다. 진찰 후 선생님은 근육도 없는 목인데 속근육이 많이 뭉쳤단다. 결론은 나쁜 자세와 운동부족이었다. 치료실에 가서 가운으로 갈아입고 핫팩을 깔고 누웠다. 어깨와 목에 전해오는 열기로 몸이 노곤해졌다. 또 잘못된 습관으로 이 모양이 되었구나 후회를 하면서.

올여름 8월, 한 달 동안 난 ‘30일 운동 챌린지’라는 프로그램에 동참했었다. 참가자들은 매일 각자의 운동기록을 사진 찍어 단톡에 공유하거나 몇 보를 걸었는지 인증 앱을 올리는 것이었다. 더위에 생활이 너무 늘어질 듯했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 조금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기에. 매일 아침부터 올라오는 운동 사진을 보면서 경쟁심이 자극되어 하루에 한 번이라도 기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집 주위라도 돌고 공원을 찾았다. 서로의 운동을 응원하는 프로그램이 좋은 아이디어라 여기면서. 하지만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니 다시 소홀히 여기게 되었으니...

칸막이가 된 치료실에는 침대가 열 개 정도가 놓여있다. 각 침대마다 커튼이 쳐져 있고 두세 명의 간호사가 부지런히 치료를 도와주고 있었다. 부황이나 침 치료를 받을 땐 눈을 감게 된다. 조용한 뉴에이지 음악이 긴장을 풀어주었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소리에 민감해졌다. 슬리퍼 끄는 소리, 의료기구를 움직이는 바퀴소리 무엇보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침을 놔주는 한의사의 손길에 난 긴장되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정말 매력적이고 건강했다. 목소리 미남,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환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성우를 해도 될 정도로 그 목소리는 나를 기분 좋게 했다. 마스크 벗은 선생님의 얼굴을 상상해보며 스르르 잠이 왔다.

핫팩과 부황치료, 침 치료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목과 등에 침을 꽂고 베개에 엎드려 잠이 들락 말락 할 그때 어디선가 힘없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체한 것 같아 왔어요. 어제 내과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은 별 이상은 없다 했지만 계속 안 좋아서... ” 어제 배 부위가 많이 아파 숨쉬기도 어려웠고 삼십 분 정도 꼼짝도 못 했단다. 선생님은 해당 부위의 근육을 만져보았더니 체한 것과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며 부정맥이 의심된단다. 살짝 협심증이 왔던 듯하니 다음에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 큰 병원으로 가라고 말해줬다. 몹시 고마워하는 나즈막한 음성이 들렸다.

부정맥, 그 단어를 듣자 갑자기 옛일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친정엄마도 부정맥이었다. “형님, 어머니 입원하신 것 아세요?” 딸보다 먼저 알고 전화한 올케에게 편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난 그때 직장 다니느라 엄마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우리 집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고 누구도 신경 쓰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병원에 도착해보니 엄마는 웃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의 밝은 모습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부정맥이 어떤 것인지 생각도 안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엄마는 암 투병하는 아버지를 간병하다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부모는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다. 갑자기 귀에 들려온 부정맥이란 단어는 나를 아프게 찔러댔다. 가슴 밑바닥부터 무언가 올라오는 듯 아파오면서 눈가가 뜨거워지고 어깨가 들썩거렸다. 울컥하며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기에 그 슬픔은 이제 희석되어 담담하게 회상할 수 있다 여겼다. 그러나 나의 애도는 너무 얕았나 보다. 베개에 깔아 준 티슈에 눈물 자국이 묻어났다.

이 가을, 지인에게 꽃 선물을 받았다. 분홍 리본이 달린 깔끔한 흰 포장지 속에 잔잔한 아이보리와 붉은 들국화는 향이 진했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꽃이던가. 꽃 선물은 왜 이리 좋은 걸까. 시인의 말처럼 봄에 소쩍새 우는 소리와 여름의 소나기와 뇌성이 들어 있어서 일까. 마치 가을이란 계절을 선물 받은 듯했다. 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을 담아 선물해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조금 있으면 엄마의 기일이다. 가을비가 그치고 단풍이 고운 어느 날 나도 국화 한 다발 들고 엄마 영전에 찾아가야겠다. 이제야 나도 나이가 드는 아픔이 있다고 하소연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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