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동물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셨다. 약육강식의 잔인한 장면이 싫었지만 채널 선택권이 없던 나는 그냥 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취미는 수영과 정구에서 점차 낚시로 바뀌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서해안 섬으로 피서를 갔다. 배에 타니 출렁이는 검푸른 파도가 무서웠지만 도착한 섬은 수심이 얕고 놀기에 좋았다. 아버지는 동생과 나에게도 망둥어 낚시를 알려주었다. 떡밥을 낚시 바늘에 끼워서 얕은 바닷물에 던지니 망둥어가 계속 올라왔다. 심지어는 미끼가 없어도 날카로운 바늘을 그냥 물었다. 머리가 나쁜 생선이라 생각하면서 잡는 재미에 빠졌다. 이렇게 낚시가 쉬울 줄이야.
그 후 아버지는 주말이면 가끔 경기도 이천 근처로 낚시를 하러 가셨다. 가기 전 날엔 거실 한쪽 바닥에 낚싯대와 알록달록한 찌를 늘어놓고 일일이 손을 보셨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놓고 찌를 띄워보고 철저히 준비하셨다. 얼굴에는 월척에 들뜬 기대감이 엿보였다. 엄마는 주말 과부가 됐다며 불평을 했지만. 나도 바다낚시의 기억이 생각나 따라가고 싶었다. 드디어 엄마의 성화에 아버지는 가족 모두를 데려가셨다. 자가용도 없던 그 시절, 초여름 아침 일찍 떠났어도 저수지에 도착하니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근처 옹색한 낚시점에 들러 떡밥과 지렁이를 사 가지고 흙먼지가 날리는 길을 터덜터덜 걸어 언덕 위 낚시터에 자리를 잡았다. 야외용 좁은 의자에 앉아 낚싯대를 물에 띄우고 찌의 움직임을 살피는 일은 못할 일이었다. 물에 비친 햇살이 따갑고 눈이 부셨다. 바람이라도 불어 잔물결이 일면 물 위에 나와있는 찌를 한참 쳐다보기엔 눈이 아팠다. 어지럽고 지루했다. 물고기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입질도 하지 않았고 낚시 따라가겠단 말은 쏙 들어갔다.
가끔 혼자 낚시를 다녀온 아버지의 바구니에는 손바닥만한 붕어들이 가득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혹시 물고기를 사 오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지만, 웃으며 잡아온 붕어의 비늘을 벗기고 내장을 꺼내고 깨끗이 씻어 들기름을 넣고 큰 솥에 폭 고았다. 밤새도록 비린 냄새가 진동하고 물이 반으로 줄면 채에 걸렀다. 뽀얀 국물 한 사발을 담아 내게 내밀었다. 노란 기름이 동동 떠있는 붕어탕이었다. 먹기 싫다고 입을 내밀면 엄마는 다 마실 때까지 지켜보았다. 붕어탕은 단백질이 많고 위에도 좋은 보약이라 달래면서.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나는 편도선이 자주 부었다. 가진 것은 건강한 몸 밖에 없던 부모님은 나 때문에 애가 탔으리라. 중학교 때 편도선 수술을 하고 나서 엄마는 보약을 달이느라 집에 쌉쌀한 한약 냄새가 났다. 부모님을 따라간 남대문 허름한 음식점에서 소고기인 줄 알고 먹은 음식이 보신탕이었다. 한 번 먹고 나니 군말 없이 먹어야 했다. 여름이면 엄마는 모란시장에서 고기를 사 와 수육과 개장을 해서 온 가족 몸보신을 시켰다. 커서 사람 구실 못할까 봐 엄마는 노심초사하며 특히 나를 걷어 먹였다. 그러나 난 아침밥은 안 먹어도 왜 그렇게 머리를 감았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부족해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했기에 현관에서 엄마는 내 책가방을 잡고 밥을 안 먹으면 학교에 못 간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승자는 항상 나였다.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었으니까. 나는 머리가 커갈수록 부엌데기인 엄마의 말을 무시했다.
진해에 살 때 먹을 것이 부족해 밤에 몰래 다락에서 먹던 건빵도, 포천에서 한 겨울이면 시내로 나가 목욕하고 맛나게 먹던 자장면도 맛났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담당이었던 빈대떡은 결혼해서도 항상 명절이면 기름 냄새 맡으며 힘들게 부쳐 가져갔기에 이 또한 잊을 수 없다. 아버지의 흐뭇해하는 미소에 힘들어도 전을 준비했었으니까. 그러나 가장 잊을 수 없는 음식은 아버지가 하루 종일 걸려 손수 잡아오고 엄마가 밤새도록 다려 내게 대령했던 그 비릿하고도 고소한 한 사발, 바로 붕어탕이다. 부모의 사랑으로 폭 고아진 그 국물이 지금 내 몸의 일부를 만들었다. 특히 엄마의 마음을 등한시했던 철없던 그 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비릿한 추억의 맛이다. 말년에 아버지의 외로운 병실 텔레비전에는 낚시 프로가 켜있었다. 화면 속 붕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야윈 모습이 아직도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