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하셨다. 가족을 데리고 극장에 간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영화 사랑은 결국 KBS 명화극장으로 이어졌다. 우리집 낡은 흑백 티브이는 골드스타(금성)제품이었다. 가끔 화면이 잘 안 나올 때면 얇고 긴 두 개의 안테나를 이리저리 움직이곤 했다. 굵은 뿔테 안경을 쓴 정영일 씨의 예고편을 보며 명화극장을 기다렸다.
주말 밤, 9시 뉴스가 끝나고 늦은 시간에 시작하는 명화극장은 성우들의 멋진 목소리로 더빙한 외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으니까. 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OST를 편곡한 오프닝 음악이 나오면 눈을 반짝였다. 엄마와 동생들은 중간에 잠들어 버리고 아버지와 나만 끝까지 영화를 보았다. 키스 장면이 꼭 한 번은 나왔지만 모른 척 졸린 눈을 부릅뜨면서.
직업군인인 아버지는 존 웨인이 나오는 서부극과 ‘지상에서 영원으로’ 같은 영화를 반겼다. 주인공 프로이스(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눈물을 흘리며 부는 트럼펫 연주는 현충일에 듣는 나팔소리와 비슷했다. 난 ‘로마의 휴일’, ‘러브스토리‘ 같은 사랑 영화가 더 끌렸다. 오드리 햅번의 공주와 같이 우아하면서도 순수한 표정과 알리 맥그로우의 청순한 모습을 부러워하면서.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 are sorry.”(사랑이란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는 것)이란 알리 맥그로우의 영어 대사를 외웠다. 사랑의 깊은 뜻도 몰랐지만. 더스틴 호프만, 로버트 레드포드, 버트 랭커스터 등 남자 배우의 이름을 시험공부하듯 외웠다. ’졸업‘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막장 불륜 연기가 왜 그렇게 멋지던지. 난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남산 근처 회현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동안 사귄 친구들과 헤어져야했고 새학교 적응도 수학공부를 따라가는 것도 어려웠다. 새친구들을 사귀는 일도 예전과 달리 쉽지 않았다. 비록 많은 전학을 다녔을지라도. 아버지의 근무지는 강원도 부대로 바뀌었기에 엄마는 주말이면 동부 고속버스를 타고 그곳을 오갔다. 그레이 하운드가 그려진 버스였다. 나와 동생은 방학 때만 아버지의 관사에 갈 수 있었을 뿐. 난 엄마가 해놓은 음식으로 동생들을 챙기면서 주말을 보내야만 했다. 부모님이 없는 삭막한 아파트에서 딸과 누나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지만 친구도 없는 좁은 집은 쓸쓸했다. 주말에 함께 보던 영화의 즐거움도 퇴색됐다.
미남배우 같은 아버지께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꾸중을 들었다. “계집애가 뭘 할 수 있겠어.” 난 그 말을 마음에 꽁하게 담았다. 딸이라서 못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반항심도 생겼으니까. 엄마도 자식들을 보듬었지만 아들에 대한 기대가 몸에 스며있었다. 아버지의 베개며 누워있는 동생들도 타넘지 못하게 했다. 아들에 대한 편애, 아들들에 대한 기대가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험 때 밤늦게 공부를 하려면 왜 그렇게 졸리던지. 책상에 엎드려 졸다가도 엄마의 방문 여는 소리에 발딱 고개를 쳐들고 공부하는 척했다. 엄마는 항상 “그만 하고 어서 자라.”고 말했다. 대견함과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엄마의 그 말은 내게 부담을 주지 않아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딸의 공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란 뜻인가. 딸에 대한 기대보다는 걱정이 묻어났다. 부모님의 그 말이 서운했지만 그럴수록 난 내색하지 않고 내 공부에 열심을 냈다. 아니 자수성가한 부모님이 억척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흉내낸 것이리라.
지금 생각하니 내 인생은 영화처럼 멋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각자의 배역을 하느라 애썼다. 이제 내가 부모가 되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한다. 나 또한 어떤 딸이었는지도. 부모에게도 어쩔 수 없이 대물림되는 생각과 자신만의 사연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야속하다 여겼다. 오기로 나를 채찍질하기도 하면서.
다가오는 부모님 기일, 현충원에 찾아가 미안한 맘을 전하면 부모님은 나에게 어떤 말을 하실까. 어쩌면 영화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사랑은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는다”며 나를 위로하시지는 않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