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모자

by 가을장미

“엄마, 나 2주 후면 입대해요.”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전공이 맘에 안 들어 대학을 휴학한 아들이 인터넷으로 자진입대 신청을 했다. 분단의 현실을 느껴보고 싶어서 철책선이 가까운 강원도로 정했단다. 그때의 당혹감이란···. 입대하는 날에도 나는 일을 한다고 같이 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삶의 중요한 것과 급한 일을 구별 못하고 지냈던 무지한 엄마였다. 짧은 눈 맞춤으로 눈물을 감추고 보냈다. 그때 아들의 그 눈빛은 지금도 가슴에 박혀 있다.


아들은 양구의 신병교육대에서 한 달의 훈련 후 자대 배치를 받았다. 남편은 틈만 나면 훈련 사진이 올라오는 인터넷 카페를 뒤졌다. 훈련받는 신병들 사진 속에서 아들을 용케도 찾아냈고, 사진으로 안부를 확인하며 웃을 수 있었다.


첫 면회 가던 날, 12월의 추위 속에 구불구불한 산 길을 따라가며 군부대로 향했다. 맑고 투명한 양구의 추위는 서울과는 사뭇 달랐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날카로운 바람 속에 밤송이 같은 머리에 작대기 하나를 단 이병의 모자를 쓰고 나타난 아들. 얇은 군복에 벌 건 손 그리고 신고 벗을 때마다 한참 시간이 걸리는 군화를 신고, 이제는 나라의 아들이었다.


허름한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싹 싹 비우고 아들은 오랜만에 외식의 기쁨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웃풍이 센 펜션에서의 하룻밤과 하얀 입김 뿜으며 주일 아침 낯선 교회에서의 감사 예배. 준비해 간 단출한 음식으로 아침밥을 차려 따끈한 한 끼 먹이고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지.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은 부대에서 시험 본다며 적어온 수첩을 외우고 또 외웠다. 선임과 동료의 부탁을 가득 적은 쪽지를 보며 같이 물건 사느라 면회시간을 다 쓰고. 다시 부대에 들어가기 전엔 남은 시간을 확인하며 아쉬워했었지.


몇 번의 면회를 통해 양구에 대해 훤하게 알게 되었다.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한 양구의 천문대와 곳곳을 다니며 유난히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기는 가족 여행의 시간이기도 했고, 땅굴과 철책선 넘어 북한 땅을 보며 나라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도 되었다. 항상 이별의 아쉬움 속에 부대로 보내고 돌아오는 길, 유난히도 빛나던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도 서늘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육 개월 뒤쯤엔 휴전선 철책 근무를 위해 GOP로 올라가 일 년은 면회도 갈 수 없었다. 아들은 밤에 보초 서면서 천문대에서 보았던 그 밝은 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으리라. 자신의 별자리도 찾아보고 인생의 좌표도 그려보면서. 그러던 중 전해 진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상병 모자를 쓰고 늠름한 모습으로 휴가 나온 아들. 할아버지의 일생이 담긴 군 유품 액자를 들고 동작동 충혼당에서 마지막 장례일정을 치렀다. 납골당에 한 줌의 재로 변한 유골을 안치하고 부대로 총총히 복귀하며, 할아버지의 무궁화 대령 모자가 그렇게 높아 보일 수가 없다는 말을 남겼었다.


그 해 겨울, 끝도 없이 내리는 눈쓸기가 가장 힘들었다는 아들의 말이 생각나서 나도 눈이 싫었다. 밤에는 철책을 지키느라 졸린 눈을 비벼가며 보초서고 있을 모습에 잠 못 드는 많은 부모들의 마음도 생각하게 되었으며. 아들이 군에 간 이 년 여의 기간이 제일 가슴 졸이며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아들 또한 집과 부모의 의미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홀로서기의 기간이었으리라.


드디어 찬란한 병장 계급장을 단 모자를 쓰고 “충성,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집에 와 경례를 할 때, 다시 나의 아들이 되었다. 그때의 안도감이란. 지금도 옷장 속에 있는 아들의 그 국방색 모자를 보면 양구의 적막함과 고단함이 되살아난다. 이젠 입대 걱정하는 엄마들에게 2년은 금방 지나가고, 또 다녀와야 사람 된다고 여유 있게 말하게 됐지만. 땀과 눈물,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병의 기다림이 담겨 있는 짠한 아들의 사병 모자는, 삼십여 년 쓴 아버지의 장교 모자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나의 철없음을 일깨워 주었다. 무정함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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