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분비내과 대기실은 사람들로 붐볐다. 담당 간호사에게 진료예약증을 내밀자 먼저 생년월일을 물어보며 신원 확인부터 했다. 잠시 앉아 진찰실 앞에 설치된 화면을 지켜보았다. 예약 순서에 따라 대기 중, 진료 중으로 바뀌는 글자를 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아픈 사람을 대하는 의료인들에게 존경심이 느껴지긴 했지만 몇 개월 만에 고대하던 의사와의 면담은 삼십여 분 기다려 고작 1~2분 걸릴 것이다.
진료실로 들어가니 인상 좋은 중년의 담당 의사는 혈액검사 결과가 기록된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켰다. 안정되게 하강곡선을 그리던 그래프가 갑자기 45도 각도로 길게 올라가 있었다. 선생님은 소독약을 바른 손으로 내 갑상선 부위를 만지며 스트레스가 많은가 보다며 말을 아꼈다. 기존 약보다 3배나 강하게, 혈압약까지 처방해 주고는 2개월 뒤에 보잔다. 허긴 담당 의사도 당황했을 것이다. 그동안 잘 잡혀 가던 증상이 갑자기 악화가 되었으니까.
올해 초,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몇 년간 먹던 갑상선 항진 약을 끊을 수 있겠다 예상했다. 갑상선과의 동행을 마치며 부드럽게 연착륙을 하던 참이었는데… 몇 년간의 수고가 무너졌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가. 탁상 달력에 빼곡히 적었던 스케줄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좋아서 했던 일들도 즐기며 하지 못했던 것일까.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에 성실하자던 결심이었지만 너무 욕심을 냈고 기본생활을 소홀히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몇 달 전부터 가슴이 벌렁거렸다. 첫사랑의 설렘과는 다르게. 가슴에 손을 대고 가만히 눌러본다. 숨이 가쁘다. 갑상선 항진은 몸의 신진대사를 조절해주는 호르몬이 너무 많이 나와 누워 있어도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것처럼 신진대사가 빨리되는 병이란다. 아마도 성격이 예민한 나 같은 사람이 걸리지 않을런지.
“보나베띠”(프랑스 말로 잘 먹겠습니다)하며 그동안 소홀히 한 내 몸에 보상도 주어야겠다. ‘줄리와 줄리아’란 영화에 나온 근사한 프랑스 음식이 떠올랐다. 미국의 전설적인 프랑스 요리 연구가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와 그녀의 요리책을 보고 직접 요리해보며 자신의 블로그에 옮겨 유명해진 줄리 파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두 사람에게 있어 요리는 각자의 삶을 즐겁게 변화시킨 기폭제였단다. 포도주를 넣고 만든 ‘뵈프 부르기뇽’은 꼭 한 번 먹어 보고픈 요리지만 내가 만들기는 그림의 떡이고 아몬드 초콜릿 케이크 정도는 가능할까. 아니다. 우선 평범한 삼시 세 끼의 즐거움으로 몸을 회복해야 하리라.
각오를 다지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초록 신호등이 켜진 것이 보였다. 좀 멀었지만 뛰어갈까 잠시 망설이면서. 그러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었고 그사이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었다. 건널목에서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보다가 문득 지금 내 인생도 빨간 불이 들어온 듯. 그러니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인생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달리지 못하고 서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의 그릇은 작은데 조바심을 내며 너무 많은 것을 빨리 담으려고 달렸을까. 성취욕과 사람들의 인정에 끌려 마치 단거리 달리기 하듯이. 시간과 건강이 다 내 것인 양 마음대로 하면서. 다시 나를 돌아보고 급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시간관리에 좀 더 가지치기를 해야겠다.
이 겨울, 나의 내면의 정원을 이제부터 잘 가꾸어 봐야겠다. 나무와 꽃들이 차가운 침묵 속에서도 어떻게 자라나는지, 자연의 해와 달과 별이 고요 속에서도 어떻게 운행하는지 생각하면서.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하리라. 잘 정돈된 단단한 마음이 알찬 하루를 만들고 또 열매 맺는 인생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반짝이는 재능보다는 인내와 자기 훈련으로 여유를 가지고 가다 보면 나만의 성장과 성숙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마라톤 주자가 출발선에서 마음을 가다듬듯이 빨간 신호등 앞에서 나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