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시간,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귓가에 작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나도 모르게 책을 내려놓았다. 마치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갯짓하는 듯한 섬세한 소프라노의 음색이었고 특히 고음 끝 소절의 울림은 파르르 떨리는 작은 새의 노래 같았으니까. 책상에 앉아 있던 남편 쪽에서였다. 누구 노래냐 묻자 한 때 정말 내가 좋아했던 성악가가 부른 리메이크 곡이었다. 그 가사에 옛 시절이 떠올랐다. 코트를 단단히 여미고 추운 광화문 거리를 총총히 걸어가던 젊은 내 모습이.
본격적인 첫 데이트였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약속 장소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그 남자를 만나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2층 좌석에 앉아도 낯설었고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약간 위축되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은 생소했고 지루했으며 언제 박수를 쳐야 하는지도 몰라 난감했으니까. 남들이 하는 대로 눈치껏 따라 하다가 하품이 났다. 내겐 감상이 아닌 소음 고문이었다. 어쨌든 음악회를 시작으로 한 남자와 내 인생 여정이 엮이기 시작했다.
그는 말이 많지는 않았다. 어느 날 만남에서는 새해 계획이 무엇인지 묻길래 계획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을 뿐. 그 후 우리의 만남은 광화문 근처에서 지속되었다. 그럴 때면 찻집에서 난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에 관한 말들을 그는 조곤조곤해주었다. 실내악 현악 사중주는 스트링 쿼테트(String Qartet)로 바이올린이 2대와 비올라, 첼로로 구성되고, 현악 오중주는 퀸텟(String Quintet)이라느니 하면서. 신기했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클래식은 나의 아킬레스건이었으니까. 나와는 다르고 달라서 그에게 끌림이 있었으리라.
우리는 5월에 결혼식을 올리면서 둘만의 인생 여행을 시작했다.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와 말러의 교향곡 ‘부활’ 레코드를 선물해주던 그 남자는 결혼 전과 결혼 후가 확실히 달라졌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로. 말이 필요 없는 남자가 되어갔다. 사랑의 시효는 삼 년이라 했던가. 아니 육 개월도 채 가지 않았다. 그가 준 레코드의 제목처럼 소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고 아내와 엄마로 다시 부활해야 할 것을 예견하듯이.
목사님은 주례사로 하나님이 매신 것을 사람이 풀 수 없다시며 둘이 하나가 되라고 축복하셨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웠다. 마치 내가 처음 들어 이해 가기 힘들었던 그 교향곡처럼. 자신의 반을 비워내고 새롭게 채워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지금껏 별로 소통이 되지 않는 남편과 그나마 통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음악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이 아닐까. 우리의 첫 만남이 음악회에서 시작됐듯이. 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아 싫어도 자꾸 들으니 이상하게 익숙해져 갔다. 쇼스타코비치의 경쾌한 ‘왈츠‘처럼 묘한 마력으로.
나의 결혼 교향곡 1악장은 달콤한 선율도 있었지만 많은 불협화음이 가득했다. 서로를 길들이려 기 싸음의 거친 음악을 매일 변주했다. 뾰족하고 험한 투닥거림 속에서 가정의 질서는 그래도 점차 만들어져 갔다. 2악장은 아마도 첫 딸과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였고 우리의 관심은 자녀에게로 옮겨갔다. 나는 육아로 조금 지쳐가기도 했지만 완만한 속도의 음악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봄날 철쭉이 핀 아파트 화단에서 딸과 아들의 사진을 찍으며 가족 앨범을 채워 나갔다.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를 낙관하면서.
하지만 결혼이란 여행길은 우리의 계획과는 달랐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던 나의 봄날 같은 결혼생활 뒤에는 휘몰아지는 3악장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남편과 나의 계획에는 전혀 없던 일들이었다. 천둥이 치고 태풍이 몰려오던 혹독한 여름 같던 계절이. 돌고 돌아 이제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요즘도 가끔 그때를 회상하면 ‘그놈의 쿼테트, 퀸텟만 아니었어도…’
결혼이란 여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행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고 하면 나는 결혼생활을 통해 후회가 아닌 진정한 그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고통스러웠던 여름을 통해 청춘의 오만함을 벗고 좀 더 원숙하게 남편과 화음을 맞추면서. 그 남자와의 낯선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의 내면과 한계를 직면하면서 어렵지만 일상을 여행처럼, 제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면서 4악장을 마무리하고 싶다.
“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 어느새 노래는 끝이 났다. 여운을 남기며. 광화문 찻집에서 다정하게 속삭이던 옛사랑, 그 남자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노래 속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