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만난 남자

by 가을장미

얼마 전 추운 밤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9시 전후였던 듯싶어요. 집 앞에 도착했단 문자를 받고 물건을 쇼핑백에 담아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마치 007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임무를 수행하듯요. 아파트 자동 현관문을 나서니 가로등이 켜진 주차장에 누군가 서있었지요. 앞 유리에 메모지 한 장이 붙어있는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왔고 머리에서 발까지 방한복으로 풀 장착한 모습이었습니다. 큰 덩치에 검은색 마스크를 쓴 낯선 남자와 만남은 어색했지만 인사하는 당신의 목소리는 정중했습니다. 그 밤 짧은 만남이 저에겐 여운이 남아 이렇게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써봅니다.


쇼핑백에서 박스를 꺼냈지요. 당신이 찾던 물건, 검은색 뉴*란스 운동화였어요. 사이즈는 이백팔십, 박스가 조금 찌그러져 있었지만 당신은 포장은 상관없다고 흔쾌히 말했지요. 아들이 샀다가 신지 못했던 신발이 드디어 주인을 찾아가니 심부름하는 저도 후련했답니다. 신발을 꺼내서 자세히 보지도 않고 치수만 다시 확인한 당신은 오토바이 뒤에 장착된 커다란 박스 안에 그 신발을 넣었지요. 난 잠시 긴장했습니다. 아들은 먼저 돈을 받고 주라고 당부했거든요. 혹시나…


그런데 당신은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했어요. 곧이어 아이 목소리가 들렸고 엄마를 바꿔달란 말에 지금 엄마는 동생 목욕시키는 중이라 했지요. 잠시 후 아내에게, “ㅇㅇ야, 내가 전에 말했던 그 운동화 샀으니까 지금 빨리 이체 좀 해라. 방금 보낸 문자 확인하고 그 계좌로.” 순간 목욕시키느라 분주할 아내분의 모습이 생각났어요. 난감했지요. 그런데 두 말 않고 순순히 알았다는 아내분의 목소리가 들렸답니다. 나 같으면 그런 순간에 걸려온 전화는 짜증이 났을 텐데 말입니다.


잠시 기다리면서 당신은 말했지요. 아버님 생신선물이라고. 아버지는 발볼이 넓고 발이 안 좋아 알맞은 신발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신어본 후론 이 제품만 찾으신다고. 정가의 절반 값으로 사서 만족한 목소리였지요. 부부가 아버님 생신을 앞두고 무얼 사드릴까 의논을 했고 또 싸게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당* 앱을 찾아보는 모습이 떠올랐답니다. 그런 사연으로 우린 판매자와 구매자로 만나게 되었네요.


나는 시부모님이나 친정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고민해 본 적이 있었나? 별로 기억이 없더라고요. 우리 엄마는 돈을 좋아한다며 가장 편한 봉투로 드리곤 했거든요. 그러면 엄마는 손주들을 위해, 결국 그 돈은 돌아서 우리에게 오곤 했습니다. 받는 사람에게 딱 맞는 선물을 한다는 건 그 사람 입장이 되어서 고민해야 하기에 어려웠습니다. 평소에 그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그 과정이 귀찮아 언제나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해버렸기에 아버지에게 요긴할 신발의 사이즈와 메이커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당신이 다시 보였답니다. 이제 저는 양가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셔 무얼 해드릴 수도 없습니다.


입금 확인 문자가 빨리 오지 않으니 당신은 어색함을 깨려고 다시 말을 시작했습니다. 18층 아파트를 올려다보면서 요즘 이 아파트는 얼마나 하냐고요. 그 말로 미루어 당신의 형편을 또 짐작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집값이 말도 안 된다며 대화를 이어갔고 당신에게선 가장 중요한 젊음이 보였지요. 어쨌든 전화를 두어 번 더 아내에게 했지만 목욕시키던 젖은 손을 닦고 계좌번호를 확인해서 보내는 과정은 좀 시간이 걸릴 수밖에요. 당신은 늦어져 미안하단 말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무렵이 떠올랐어요. 그맘때의 재롱이 효도의 전부란 말이 있듯이 아들은 귀여운 짓도 가끔 했답니다. 할머니에겐 아파트, 할아버지는 그렌저 자동차, 누나는 헤어밴드를 선물하겠다는 손주의 말에 부모님은 웃으며 이미 그 선물을 받으신 것처럼 좋아하셨지요. 지나고 보니 그런 공약을 남발한 손자를 둘러싸고 손뼉을 치며 웃었던 그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더라고요. 비록 아이답지 않은 말이긴 했지만요.


잠시 뒤 핸드폰 너머로 송금했단 말이 들렸지요. 벌써 십여 분은 지난 듯했어요. 그런데 내 핸드폰에서는 문자가 확인이 되지 않자 당신은 천천히 확인하고 가시라 했지요. 일이 끝나자마자 물건을 받기 위해 달려와 배도 고플 듯했건만. 꼭 확인하라는 아들 말이 생각났지만 난 확신했습니다. 이미 돈은 들어왔으리라는 것을. 부인이 보냈다니 맞을 거라는 내 말에 만약 안 들어왔으면 전화하라면서 당신은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떠났지요. 가장의 책임을 짊어진 건장한 어깨를 뒤로한 채.


오토바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아파트 자동문을 들어서니 ‘딩동‘ 문자가 떴어요. 미션 완료!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당신의 가정이 그려졌답니다. 집안 대소사를 도란도란 의논하며 살아가는 부부, 아픈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 어린 자녀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비록 삶의 무게가 느껴졌지만 그것을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부부간의 신뢰가 느껴져 마스크 속 입꼬리가 올라갔답니다.


코노나 상황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특히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일들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재택근무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일들에 관해서요. 묵묵히 맡겨진 자신의 일을 하는 당신과 그 일이 우리 사회에 소중한 것임을 새삼 느낀답니다.


지금 생각하니 아내분의 전화를 기다리며 지루하던 순간에 아이들은 몇 살인지, 부인과 아버님에 대해 좀 더 물어볼걸. 인터넷뱅킹은 웬만하면 다 있을 텐데 없는 이유는 무언지도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가계부를 쓰는 알뜰한 아내가 경제권을 쥐고 있어서 인가요. 그렇지만 아내에게서 애정과 믿음이 느껴지는 든든한 남편의 모습이었답니다.


오늘도 아파트를 나서면서 벌써 퀵 오토바이를 두 대나 봤습니다. 그럴 때면 그 밤이 떠오르곤 한답니다. 연락이 없으신 것을 보니 운동화가 아버님께 잘 맞나 봅니다. 다행입니다. 시간이 돈이겠지만 신호 위반하지 마시고 항상 건강 조심하셔요.

2022년 2월 당신 근처에 사는 아줌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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