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선물

by 가을장미

산수유 꽃이 노란 좁쌀 같은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겨울 동안 쌓인 먼지가 뿌옇다. 봄맞이 청소를 생각하며 베란다 창고문을 여니, 켜켜이 쌓인 잡동사니 중에서 낡은 한 상자에 눈이 갔다. 그 안에는 학창 시절부터 끄적거렸던 일기와 매년 적었던 수첩, 소녀 시절 주고받았던 편지들로 가득했다. 손편지에는 쓴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해 나는 그것들을 버리기가 어려웠다. 먼지가 앉고 색이 바랜 그 종이뭉치들을 이사 때마다 끌고 다녔다. 남편이 버리라 해도 손사래를 치면서. 먼지를 털고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반가운 그 편지의 주인을 떠올리며.


교생실습은 집에서 먼 S 여중에서 했다. 강남에서 한강 다리를 건너 버스로 한 시간 반 정도는 족히 걸렸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학생들을 만났고 어설픈 수업을 진행했다. 여중생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한 달 남짓 잠시 머물다 가는 교생들에게 넘치도록 많은 정을 주었다. 직업적인 선생님과는 달리 언니 같은 친밀감을 느껴서일까. 그때는 교복세대인 나와는 달리 잠시 교복자율화 시기였다. 커트머리에 하얀 피부인 그녀는 청자켓을 입고 앞줄에 앉아 있었다. 차분하고 중성적인 모습의 그녀와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한 달간의 실습은 금방 끝이 왔다. 그녀와 반 아이들은 떠나는 날 들기 힘들 정도의 선물과 편지를 주었고 몇몇 소녀들은 그 후로도 연락을 해왔다. 그중엔 물론 그녀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했고 변두리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 헸으니까. 딸아이가 태어났고 육아로 바쁜 어느 날, 친정에 연락해 주소를 알아낸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어 집으로 찾아왔다. 우리 동네 근처의 여고에 배정이 되었다면서. 여동생이 없던 나를 언니라 부르며 따랐다.

만남이 이어지자 그녀는 자신의 아픈 가족사를 털어놓았다. 눈물을 보였지만 담담하게. 생각도 못했던 깊은 상처였다. 밝은 모습 속에 그런 상처가 있을 줄이야. 나는 사람의 내면을 잘 보지 못하는 무심한 언니였다. 나의 이런 철없음에 끌렸을까. 그녀는 아팠고 여고를 휴학했다. 좀 늦게 대학생이 되었지만, 성실하고 끈기가 있었기에 대학생활을 잘해나갔다. 어학연수 차 갔던 중국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머물렀던 영국에서도 자상하게 근황을 적은 엽서를 보내왔다. 하지만 우리의 만남은 모두 그녀의 노력 덕분이었고 나보다 더 언니 같은 속 깊은 동생이었다.

가끔 집에 올 때면 어린 딸아이와 놀아줬고 이모가 되어줬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밥을 차렸다. 훗날 그녀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언니가 집에 있던 그때가 정말 좋았단다. IMF 경제위기를 맞아 남편의 설계사무실이 문을 닫으면서 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 이후로 우리의 만남은 좀 소원해질 수밖에.

어느 시인이 말한 대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오는 것이리라. 내게 먼저 다가와 나를 언니 삼아준 여동생 같은 그녀. 우리는 순수하고 철없던 시절 만났다. 그래도 다행히 삶의 큰 마디마다 같이 할 수 있었고 때마다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해오곤 했다. 이런 동생을 갖게 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아픈 상처를 보듬으면서 담담하게 제 길을 잘 걸어가는 그녀에게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그 편지로 이어진 우리의 인연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얼마 전 목동의 한 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오전이라 그곳은 한산했다. 상복을 입은 그녀는 나를 보자 반색을 하며 쫓아 나왔다. “언니…” 말을 잇지 못하면서. 나는 영정 속에서 웃음 짓는 고운 여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렸다. 그동안 애 많이 쓰셨다고 이제는 편히 쉬시라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던 수척한 그녀와 그녀 남편의 눈이 촉촉해졌다. 접수대에는 그녀의 두 딸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앳된 여중생의 모습으로.

육개장이 놓인 상을 앞에 놓고 그녀와 마주했다. 친정 엄마의 간병이 몇 년째 였지만 갑자기 악화되었단다. 허탈한 모습으로 말을 잇는 그녀의 머리카락엔 어느덧 흰머리가 보였다. 그녀는 결혼해서도 엄마를 자신의 집 근처에 살면서 보살펴 드렸다. 어렵게 자신과 오빠를 홀로 키운 엄마에 대한 정이 깊었으니까. 그러나 시댁에 들어가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마음만큼 엄마에게 보답하지는 못했으리라. 시어머니도 나이가 들어가니 아프시긴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우리는 부모의 죽음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죽음이 주는 선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엄마가 되어보니 부모의 노릇이 정말 어려운 것인지 깨달아간다. 부모 탓으로 돌리던 많은 말들을 나 또한 자녀에게 듣게 되고, 그러면서 부모에게 받았던 내리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뒤늦게야 알아간다. 그동안 쌓였던 아픈 기억들과 뒤늦은 화해를 해간다.오래된 그 편지 봉투엔 첨성대 그림의 우표가 붙어있고 또박또박 눌러쓴 볼펜 글씨가 선명했다.

그녀와 인연이 되어준 그 편지를 상자 속에 다시 고이 넣는다. 베란다 창문으로 오랜만에 반가운 봄비가 내린다. 우리가 만났던 그 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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