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벼락

by 가을장미


이른 아침, 남편은 자동차를 이동해 달라는 경비아저씨의 전화에 툴툴거리며 나갔다. 오늘 전지작업이 있단다. 오래된 아파트라 수십 년된 고목에는 ‘고사목 낙하주의’ 란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오전부터 윙윙거리는 전기톱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공동 현관문을 나서니 마침 기사는 사다리차를 우리 동 앞에 서있는 큰 느티나무 쪽으로 작동시키는 중이었다. 까치집이 있는 그 나뭇 가지을 쳐다보면서 소음을 피해 걸음을 황급히 옮겼다. 말끔하게 정리될 모습을 기대하면서.

동네에서 멀지 않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공원에도 이제 봄색이 완연했다. 산수유는 이제 흐드러져 색이 옅어졌고 그 뒤를 이어 별 모양의 노란 꽃들이 늘어진 줄기에 촘촘히 박혀있는 개나리가 한창이다. 파란 하늘 아래 노란색의 조합은 갑자기 어느 나라의 국기를 떠오르게 했다. 공습으로 불타오르는 마을과 끝없는 자동차의 피란 행렬 그리고 임산부들과 울부짖던 사람들을. 평온한 일상이 사라지고 졸지에 전쟁을 겪고 있는 힘없는 나라의 비운이 가슴속으로 훅 들어왔다.

며칠 전, 지인은 우크라이나에서 수십 년을 살던 자신의 동생 부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구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대피령 속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속히 전쟁이 종식되어 다시 달려갈 날만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단다. 이것이 웬 날벼락인가. 길어지는 전쟁으로 어쨌든 고통은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몫일 수밖에.

얼마 전 봤던 영화 ‘동주’가 떠올랐다. 윤동주의 시는 친숙했고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부르곤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새삼 나라를 잃고 이름조차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야만 했던 그 암울한 시대야 말로 우리나라에 가장 큰 날벼락이 아니었던가. 시인임에도 모국어를 쓸 수 없는 비참한 상황. 영화는 주권을 빼앗긴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지식인들의 고뇌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반역죄로 신문을 받던 그는 끝내 조서에 서명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럽다”라고 마치 참회록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해 가슴이 먹먹해졌다. 젊은 나이에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시가 남아서 우리에게 별처럼 빛난다. 독립을 위해 힘썼던 많은 ‘동주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산책 후 집으로 돌아와 달라진 아파트의 나무들을 보고 경악했다. 전지작업을 마친 나무들은 손발이 다 잘리고 몸통만 남은 듯 휑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까치집이 흔적도 없다. 경비실 주변 땅바닥에는 잘린 나뭇가지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을 뿐. 겨우내 봄을 기다리며 나오던 나뭇가지의 새순들이 거의 잘려 이번 봄엔 연두색 잎들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과연 조경을 아는 사람들이 작업을 한 것일까. 의심스러웠다. 아파트 관리를 위한 실용성과 신속성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관리실에서는 전깃줄에 닿을 정도로 커버린 나무와 제멋대로 늘어진 정원수들을 손보는 봄맞이 작업이었으리라. 하지만 아쉬웠다. 며칠 뒤 5층 우리 집 주방 창문으로 내다보니 전깃줄에 까치 한 마리가 외로이 앉아 있었다. 왠지 그 새가 보금자리를 잃고 옛집을 그리워하며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인간의 무정함 앞에서 속수무책인 동물의 연약함에 안쓰러웠다. 과연 공존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태풍에도 끄떡없는 집을 만들 줄 아는 까치가 부디 좋은 나무를 찾기 바란다. 다시 집을 짓고 가정을 이루기를. 나도 날벼락과 같았던 IMF의 경제위기와 벌써 몇 년째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까지, 살다 보면 피하지 못하고 겪을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올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좀 더 나를 돌아보고 단단해지는 기회가 되었음을. 머지않아 코로나의 긴 터널을 벗어나 찬란한 봄 속을 거닐 수 있는 그런 평온함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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