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가 있었다. 장르는 휴먼 법정 드라마로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신입 변호사의 대형 로펌 생존기였다. 여주인공은 흥미롭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법정 안팎에서 다양한 난관을 헤쳐나갔다. 엄청난 법조문과 판례를 정확하게 외우는 기억력과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장점이 있는 반면 사회성이 부족하고 감정표현이 서툴렀다. 즉 극도의 강함과 약함을 한 몸에 지닌 인물이었다. 엉뚱하고 솔직한 그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간 것이 인기의 비결이 아니었을지. 특히 주인공이 법정으로 유유히 헤엄쳐 들어오는 고래를 상상하며 바라보는 장면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몸길이가 십여 미터에 이르는 그 대형 혹등고래는 나에게도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흔들리던 내 청춘의 때에도 고래가 등장했다.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영화한 <고래사냥>이 그것이었다. 주인공이 꿈을 찾아 동해안으로 고래를 잡으러 가면서 겪는 로드무비랄까.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님 찾아 꿈 찾아‘ 병태 역할을 했던 가수 김수철이 부른 경쾌한 영화 주제곡과 기타 선율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그와는 분위기가 반대였던 송창식의 ‘고래사냥’도 잊을 수 없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젊은이들의 방황과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하던 영화와 그 노래들이 그립다. 청춘의 그 시절,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했고 사랑을 찾아 방황했기에 이 영화가 마음에 와닿았으리라. 그런 이유들로 사람들에게 고래는 여전히 여러 작품과 노래로 변주되는 현재 진행형이 아닐까.
얼마 전 지인의 권유로 읽게 된 천명관의 소설 <고래>는 느낌이 좀 달랐다. 출간된 지 거의 이십여 년이 되어가는 이 소설은 기존의 상식을 넘어서 낯섦과 기이함 그리고 당혹감마저 안겨주며 시작되었다. 거대한 서사가 진행될수록 굉장한 흡인력을 발휘하면서 결말까지 숨 가쁘게 몰입하게 만들었다. 거의 하루만에 다 읽었버렸으니까. 정규과정을 밟지 않은 작가였으나 이 소설로 평단과 독자의 호평을 받으며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자가 되었단다. 기존의 틀로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문단을 술렁이게 만들었고 유례없는 개성적인 작가의 출발을 알렸다고. 아마도 그 자신이 아웃사이더였기에 가능한 소설이 아니었을지.
<고래>는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세 여인의 굴곡지고 파란만장한 삶을 농염한 묘사와 압도적인 서사로 그려냈다. 신화적 상상력, 사회 괴담, 무협지 등 소설적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이를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국소설의 외연을 한층 더 확장시켰다는 평가에 걸맞게. 하지만 엄청난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기존에 갖고 있었던 고래의 의미와는 사뭇 달랐으니까. 이 소설을 통해 과연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고래는 오래전 뭍에 살던 포유동물이 바다로 서식지를 옮겨가면서 진화한 동물로 알려졌다. 아가미로 숨쉬는 어류와 달리 코로 호흡을 하며 젖을 먹이는 모성애가 강한 포유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금복에게 고래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로 각인되지만 그녀에겐 모성애는 없었다. 끝없는 사업적인 욕심과 성적 욕망뿐. 아마도 이는 인간의 멈추지 못하는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원초적인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달리면서 마지막에는 죽음으로까지 내몰린다. 평론가들이 말한 이 소설의 남근 사상에 대한 궁금증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란 장편소설을 떠올렸고 ‘딕(dick)’에는 남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적인 이야기는 이 소설에 가득한 가독성의 법칙이었다.
이제 내 독서의 그물망에는 <모비딕>이란 커다란 고래가 걸려들었다. 이것을 끌어올려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지만 찰리 채풀린이 말했듯 ‘고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란 말을 생각한다. 엄청난 벽돌책의 두께에 머뭇거리면서. 하지만 지금까지 접했던 여러 이야기들은 나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다. 너의 고래는 무엇이었고 여전히 그 고래를 쫓고 있느냐고.
이십 대때의 나는 막연히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다. 점차 머리가 커가자 직업군인인 아버지의 엄격한 권위가 싫었고 부엌데기인 엄마가 무시되었다. 자유만을 동경하면서. 부모의 그늘은 당연한 줄만 알았고 더 큰 나무 그늘을 만들어주는 남의 부모와 비교하면서 열등감 가득하고 자존감 낮은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어 비로소 그 자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너무나 긴 세월이 필요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우리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 그 자체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았음을, 가난을 이고 지고 살지 않은 것이 악착같이 살았던 그분들 덕분이었다는 것을...
지상에 상처 없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더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결혼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찾아왔다. 외환위기로 남편의 사무실이 문을 닫자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운 것은 생존본능이었을까. 모성애를 가장해 자녀의 꿈은 안중에도 없이 현실과 타협하라고 이기적인 나만의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려는 새끼고래의 방향을 틀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동안 자랑하고픈 자식과 학벌 그리고 안락한 미래를 위한 고래를 찾으며 살았지만 내 욕심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실패의 아픔을 통해 점차 세상을 깨달아간다, 아직은 허상이 아닌 나만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됨에 감사하면서.
이제 아이들은 내 손을 필요로하지 않을 만큼 컸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생겼다. 다시 나의 고래를 찾기 위한 항해에 나선다. 수많은 책의 바다를 헤엄치면서 지혜와 글쓰기라는 고래를 잡으려 애쓰는 요즘이다. 비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결국 청새치의 앙상한 뼈만 남을지라도. 지난한 그 항해의 과정들을 통해서 진실된 나를 만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