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3일~26일 기록 재구성
나의 손과 발에 직장이라는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부터 어디론가 멀리 자유롭게 훌쩍 떠날 수 없게 됐다. 열일을 강조하고 쉬는 날을 짜게 주기로 소문난 대한민국 직장러에겐 소중한 휴가의 1분 1초를 허투루 쓸 수 없다. 반나절 가량 걸리는 편도 비행, 왕복 비행 하루 이상 소요되는 시간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점점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범위가 점점 좁아졌다.
이를 머릿속에 깊이 새겨둔 채로 맞이하게 된 2018년 여름휴가 시즌, 정확하게는 남들보다 늦게 맞이한 여름휴가다. 연차와 선착순에 밀리는 설움을 안고 추석연휴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9월 말 즈음에 소중한 여름휴가를 챙길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요소들을 고려하면서 직장인이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해외행선지는 한정적이다. 그래서 어딜 가야 할지 의외로 결정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내 눈에 들어온 건 홍콩이었다. 홍콩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어쩌다'였다. '비행시간 편도 6시간 이내'를 기준점 잡고 스카이스캐너로 비행기 가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홍콩행 티켓이 싸게 나온 것을 어쩌다 발견했다. 아마 홍콩으로 떠나라는 암시가 아니었을까.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멀지 않은 곳이다 보니 여행 전날까지 철저하게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저 홍콩에 유명한 것이 무엇인지만 눈대중으로 서치 했고, 먼저 다녀온 이들에게 간단하게 방문할 만한 장소들만 몇 군데 추천받고 눈을 붙였다.
2018년 9월 23일, 홍콩으로 떠나는 날.
평소 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대여섯 시간보다 적게 잔 것 같은데, 컨디션은 최상. 인천공항 근처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조식을 포기하고 샤워를 하며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다. 서둘러 짐을 챙겨서 공항으로 향하는 무료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추석연휴인데 인천국제공항을 북적였다. 나를 포함해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가족의 유대보다 개인의 만족을 선택했나 보다. 공항 입구에 내려서 탑승수속을 밟고 보안검색을 지나 출국심사 통과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공항에 몰린 인파를 생각한다면 초고속 패스. 홍콩발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까지 약 2시간 이상 남았다. 여유를 즐기면서 한식으로 브런치를 먹었고, 인천공항 내 면세점을 돌아다니면서 아이쇼핑 하고 대형 창문 밖으로 날아다니는 비행기도 구경하면서 알차게 보냈다.
오후 12시 45분, 홍콩 익스프레스 비행기는 광활한 활주로를 달리면서 얻은 추진력을 바탕 삼아 이륙했다. 그러면서 홍콩이 위치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가 항공사여서인지 좌석 공간이 넓은 편은 아니었고, 시트도 척추를 편하게 해주진 않았다. 그래도 4시간가량 비행시간이라 크게 문제 되진 않았다. 기내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면서 잠깐 눈 붙인 사이에 어느덧 비행기는 홍콩 상공에 도달했다.
해가 남서쪽에 걸쳐 있을 무렵, 홍콩 국제공항에 발을 디뎠다. 나는 출발 전 인터넷으로 확인한 대로 곧장 홍콩 도심까지 들어갈 수 있는 AEL 공항철도를 이용하기 위해 옥토퍼스 카드를 구입했다. 한국과 달리 홍콩은 9월 말에 다다르고 있음에도 날씨가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공항에서 AEL로 환승하기까지 짧은 시간인데도 매우 습하고 답답한 기운을 느껴버렸다. 습한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큰일이다.
국제공항에서부터 도심까지 32분 달리는 AEL 내부는 다행히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 찼다. 땀을 흘리며 더위를 느낄 틈을 전혀 주지 않을 정도로 빵빵한 찬 바람이었다. 게다가 이 시간대에 탑승자가 적어서인지 차갑다 못해 서늘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양팔에는 닭살이 돋았고,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얇은 하늘색 블레이저를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AEL에서 하차하면서 입었던 블레이저를 다시 벗었다. 서늘했던 공항철도 내부와 달리 바깥은 덥고 무거운 습함이 홍콩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금방이라도 땀이 유전처럼 샘솟을 것 같았다. 예약해 둔 호텔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인천에서 홍콩 익스프레스에 탑승했을 당시 마주쳤던 승객 서너 명과 여기서 마주쳤다.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서로를 향해 '너도 여기 탔구나'라고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3박 4일간 묵을 셩완 버터플라이 온 워터프론트 부티크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남중국해와 반대편에 위치한 까우룽 반도 위로 솟은 건물들이 매우 잘 보이는 20층 높이 방 한 칸을 배정받았다. 문을 열자마자 에어컨을 가동해 내 몸을 옥죄고 있던 덥고 습한 족쇄를 해체시켰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바다를 한가운데 둔 홍콩 전경을 배경 삼아 서둘러 홍콩여행의 콘셉트를 정해봤다. 속성으로 홍콩의 다양한 정보들을 살펴본 결과, 식도락 콘셉트로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197,80년대 아시아 영화계 황금기를 이끌었던 홍콩영화의 주무대이긴 하나 사실 홍콩 면적도 작은 편이고, 대부분 현대화된 도시인만큼 구경할 만한 장소는 많지 않다. 대신 이곳에 먹을거리가 많다는 후기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래, 먹으면서 여행하자!
처음 목표는 센트럴 플라자였다. 숙소가 위치한 홍콩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자 홍콩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가 음력으로 추석을 보내듯, 홍콩 또한 같은 음력(8월 15일) 기간에 중추절 연휴가 있어서인지 센트럴 플라자가 있는 완차이 역 일대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인파들에 휩쓸려 센트럴 플라자로 흘러들어 갔다가 다시 나오게 됐다. 연휴라고 전망대 운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허탕 치긴 했으나 딱히 아쉬움은 없었다. 즉흥으로 오게 된 홍콩여행에서 전망대는 중요한 방문지가 아니었으니까. 구글맵으로 확인해 완챠이 역 근처에 방문할 만한 곳이 어디인지 찾아본 결과, 소호가 눈에 띄었다. 홍콩에서 소호가 유명하지 않던가. 지하철을 타도 되지만 도보로도 가능했기에 망설임 없이 걸었다.
홍콩에서 가장 트렌디한 지역이자 맛집, 그리고 바가 밀집되어 있는 곳 소호. 영국 런던의 소호와 같은 뜻인 줄 알았는데, 할리우드로의 남쪽(South Of Hollywood) 줄임말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좁은 길목을 경계선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사이에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홍콩영화를 대표하는 '중경삼림'을 봤던 이들이라면 다들 기억할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페이(왕페이)가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경찰 663(양조위) 집을 방문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물론 내 눈앞에 펼쳐진 에스컬레이터에는 양조위와 왕페이는 없었고, 소호를 방문한 현지인과 외국인들이 대신하고 있다. 영화와 다르게 현실은 에스컬레이터 인구밀도는 엄청 높지만, '중경삼림' OST였던 'California Dreaming'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영화 속 두 남녀를 상상했다.
인구밀도 폭발할 것 같은 에스컬레이터 타고 가다가 첫 번째 타깃이 눈에 들어왔다. 소호에서 가장 맛있는 에그타르트를 만든다는 타이청 베이커리였다. 소문난 맛집일수록 가장 기본 메뉴에 충실하며, 맛 또한 남다르다고 했던가. 타이청 베이커리의 에그타르트 또한 그랬다. 1개당 홍콩 달러 10달러 정도 하는 저렴한 가격이나,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전해지는 달걀과 고소함은 100달러 그 이상의 가치였다. 홍콩에서 맛본 첫 음식부터 훌륭했다.
타이청 베이커리의 에그타르트 3개를 애피타이저 격으로 섭취한 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가 오른편에 계단이 등장했다. 두 번째 방문지 모노가모스로 가는 길이다. 모노가모스는 소호 오는 길에 부랴부랴 검색해 봤다. '짠내투어'에도 한 번 소개됐고, 미슐랭 1 스타를 받은 맛집이다. 모노가모스에서 내놓은 탄탄면과 샤오룽바오는 과연 미슐랭이 인정할 수준이었다. '짠내투어' 멤버들이 괜히 오버리액션을 취한 게 아니다. 깔끔하고 깊은 맛이 목구멍 깊숙하게 느껴졌다. 여기도 성공적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도 든든하게 채웠고, 홍콩 중심부에 나왔으니 조용히 호텔로 돌아가기엔 뭔가 아쉬운 밤. 언제 여기를 다시 올까 싶어서 홍콩 밤바다 구경할 겸 여객선 터미널 쪽을 향해 걸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길게 길게 뻗어있는 홍콩 골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홍콩 누아르 영화 등에서 자주 접해서인지 어딘가 모르게 친숙함이 느껴진다. 현대와 레트로가 공존하고 있어서 사이버펑크 느낌도 물씬 풍긴다.
구름다리를 건너 국제금융센터 건물로 넘어와 외부 통로로 걷던 중 평화의 소녀상을 발견했다. 한국이 아닌 머나먼 타지에서 마주할 줄은 예상 못했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자리 잡은 소녀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 홍콩엔 태극기와 더불어 인공기, 필리핀 국기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한국을 넘어 다른 국가에서도 소녀상의 취지에 공감하고 응원해 준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외침에도 여전히 귀 닫고 있는 일본 정부의 뻔뻔함에 분노가 치솟았다.
마천루들이 하나 둘 내 뒤로 스쳐 지나갔다. 여객선 터미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중추절 연휴 여파인 건지, 여객 터미널 앞에는 각종 버스들이 주차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인지 북적북적했다. 저들은 고향을 가는 걸까, 아니면 연휴 기념으로 홍콩으로 놀러 온 걸까 궁금했다. 터미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선 대관람차가 눈뽕급의 조명을 켠 채 돌아가고 있었고, 그 뒤로는 온몸을 형형색색 불빛으로 채운 빌딩들이 모여 있었다. 시커먼 홍콩 앞바다는 빌딩숲을 향해 짠 내음이 살짝 섞인 입김을 보내고 있었다.
홍콩 바다가 뿜어내는 짠 바람으로 살포시 세수한 뒤, 다시 소호 쪽으로 돌아왔다. 밤 10시가 넘어가면서 펍과 클럽 등 술집들을 제외한 모든 가게들이 셔터를 내렸다. 여기서 현지인과 관광객들을 얼추 구분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술집 주변을 배회하거나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대부분이 외국인 관광객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명절을 가족과 보내지 않고 흥청망청 즐기는 소수의 현지인들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관광객 특유의 아우라들이 넘쳐났다.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람 구경을 하다가 자정이 조금 넘어서 호텔로 돌아갔다.
9월 24일, 어제와 다르게 먹구름이 홍콩 하늘을 뒤덮었다. 까우룽 반도 위로 솟은 마천루를 담아내는 창문에는 약한 빗줄기들이 부딪치고 있었다. 이건 예상 못했던 시나리오인데.
일단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그러나 야후 날씨 앱을 켜는 순간, 기다리는 걸 포기했다. 오늘 하루종일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할 예정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배도 슬슬 고팠다. 다행히 호텔 근처에 맛있는 아침을 즐길 만한 맛집이 있었다. 도보로 10~1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셩완 페리 터미널에 란퐁유엔이 있다는 정보를 수집했고, 간단하게 샤워한 뒤 휴대용 우산과 가방을 챙겨 들고나갔다.
다행히 우산을 쓰고 걸어 다닐 만큼 빗방울이 찔끔찔끔 떨어졌다. 그래도 비 오는 날은 별로 달갑지 않다. 특히 뚜벅이로 여행 다니는 나한테 있어서는 빌런과도 같은 존재였다. 페리 터미널엔 캐리어를 끌고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들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이곳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모든 여객선은 마카오로 가기 때문이다. 사실 홍콩으로 출발하기 전, 간 김에 마카오도 다녀오라는 일부 지인들의 추천을 받긴 했다. 그러나 마카오가 딱히 끌리진 않았다. 왕복 2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못 느꼈고, 그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란퐁유엔은 홍콩의 대스타 주윤발의 단골 토스트집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여행 프로그램에 종종 소개되기도 했다. 물론 주윤발이 자주 찾는 곳은 소호 본점이긴 하나, 메뉴는 셩완점도 동일했다. 시간대가 오전 10시에 가까워서인지 비교적 한산했다. 가게에는 마카오로 떠나기 전 아침을 해결하려는 여행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란퐁유엔에 대한 후기글을 찾던 중 '프렌치토스트와 밀크티를 주문하면 관광객, 치킨 누들을 먹으면 현지인'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때 치킨누들을 먹던 사람은 회색빛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아저씨 한 사람이었고, 다른 테이블에는 대부분 프렌치토스트와 밀크티였다. 치킨누들도 조금 땡기긴 했는데, 주윤발 형 단골메뉴를 여기서 아니면 언제 먹겠어. 대세를 따랐다.
종업원이 가져오는 프렌치토스트 비주얼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얇게 계란물에 묻혀 튀겨 나온 2개의 식빵, 그 사이에 카야잼이 전방위로 발라져 있었다. 식빵 위에는 버터 한 덩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여기에 꿀까지 발라먹으라고 추천해 줬다. 한 입을 베어 먹는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의 달달함인가. 밀크티는 또 어떠한가. 스타킹으로 곱게 내려서인지 부드러움 그 자체. 홍차와 연유까지 더해지니 퍼펙트. 3끼까지 성공했다. 나 자신 칭찬해.
늦은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도 홍콩섬에는 비가 계속 내렸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긴 싫고, 놀러 왔으니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은데 뚜렷한 목적지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 몇 분간 고민하다가 일단 까오룽으로 건너가 보자고 막연하게 정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동안, 까오룽 내 핫플레이스들을 검색해 봤다. 그러다 문득 번뜩이는 무언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맞다, 여기는 홍콩영화의 중심지였지! 촬영지 순례를 해야겠다.
먼저 떠올랐던 건 여명, 장만옥 주연 영화 '첨밀밀'이었다. 영화의 시그니처 장면인 자전거 투샷을 촬영했던 캔톤 로드로 향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답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캔톤 로드와 가까운 침사추이 역에서 하차했어야 했는데, 역을 착각해 한 정거장 지나 조던 역에 내렸다. 여긴 템플 스트리트 야시장과 가까운데, 대낮에 야시장에 열릴 리는 만무할 터.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에 젖지 않으려고 두꺼운 천막에 가려진 노점상들만 남았다. 잠시 길을 배회하다가 근처 맥도날드에서 크런치오발틴프라페를 시켜 먹으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이때부터 나의 동선이 꼬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비가 그치길 맥도날드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에 정신 팔린 나머지, 캔톤 로드로 가야 한다는 걸 새카맣게 까먹었다. 한 시간가량 지났을까, 게임에 열중하다 문득 떠올랐다. 아차, 내가 이럴 정신이 아니지. 다시 걸어 나와 구글맵의 안내에 따라 캔톤 로드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20분 뒤, 눈앞에 펼쳐진 캔톤 로드는 내 머릿속에 저장된 이미지와는 달랐다.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함께 손을 붙잡고 용기 냈던 여명과 장만옥은 없다. 그들이 함께 달렸던 자전거 도로는 사라지고 자동차 도로가 대신했다. 도로 주변에는 쇼핑몰이 즐비했다. 성지순례를 인증 차원에서 사진을 남기려고 했다가 이미지와 현실 간 괴리가 너무 커서 셔터를 차마 누르지 못했다.
캔톤 로드까지 왔더니 금세 배가 고파졌다. 프렌치토스트와 밀크티가 벌써 다 소화된 모양이다. 중추절 당일에 문을 연 맛집을 찾으러 침사추이 이곳저곳을 누비다가 너츠포드 테라스까지 가게 됐다. 침사추이의 란콰이퐁처럼 핫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명절 대낮의 그곳은 매우 평온했다. 대부분 셔터를 내린 상태여서 그나마 열린 레스토랑에 들어서서 페스토 수프와 8인치 로마나 씬 크러스트 피자, 모히토를 주문해 주린 배를 채웠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배를 채우고 나왔더니, 비를 뿌렸던 홍콩의 잿빛 하늘 사이로 햇빛이 빼꼼 내밀었다. 하늘을 보고 안심하며 우산을 고이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너츠포드 테라스에서 바다 쪽을 향해 걸어가던 중에 찰리브라운 카페를 우연히 발견했다. 예상치 못한 소소한 럭키였다. 2층 카페로 올라가기 전 계단 입구부터 '피너츠' 마니아들이 좋아라 할 인테리어 구성과 굿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서인지 마실거리를 찾았고, 고심 끝에 아이스초코 커피를 선택해 한 잔 마셨다. 천천히 마시는 동안, 카페를 천천히 둘러봤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손님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피너츠' 덕후로 보이는 손님들인 것 같다. 나도 어렸을 때 '피너츠'를 즐겨봤던 꼬꼬마였다. 당시 내 또래 친구들에겐 '피너츠'보단 강아지 이름인 '스누피'로 더 많이 불렸고, 나도 '스누피'가 만화 제목인 줄 알았다. 스누피의 주인 찰리 브라운이 만화 주인공이었다는 걸, 나이를 조금 먹은 뒤에 알았지만.
다시 바다를 향해 계속 걸어내려갔다. 비가 내렸다가 말았다가 계속 밀당했다. 그러다 홍콩영화 마니아들의 성지 충킹맨션 앞을 지나가게 됐다. '중경삼림'의 장면들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금발 가발과 레인 코트를 착용했던 무명의 여성(임청하)은 누군가에게 쫓기듯 도망치고, 경찰 223(금성무)은 그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영화에서 보여줬듯이, 충킹맨션은 마약과 범죄, 불법체류자들의 소굴로 악명 높았던 곳이다. 물론 2012년 깔끔하게 외장 보수를 했기 때문에 겉모습으론 알 수 없다. 다만, '厦'자 간판이 떨어진 건 계속 눈에 밟혔다.
천천히 걷고 걸어서 홍콩해에 도달했다. 어제는 홍콩섬에서 구경했다면, 오늘은 반대편인 까우롱 반도 쪽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다. 고요한 바다 위로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 한 척이 큰 소음 내지 않고 지나갔고, 홍콩섬에는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가는 고층 빌딩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멍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분명 여긴 외국인데, 왜 서울 한강공원에서 많이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질까.
집에서 제니 마약쿠키를 사달라는 요청이 지금에서야 떠올랐다. 침사추이에 나온 김에 제니 쿠키 본점을 찾으러 출발.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긴 했으나, 중추절 연휴 영향인지 제니 쿠키를 사려는 사람들 줄이 길게 길게 뻗어 건물 입구까지 이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얼마 남지 않은 재고를 구입해 돌아갔다. 여기까진 괜찮았지만, 저녁 먹으러 나설 때 문제(?)가 발생했다.
홍콩 오기 전부터 딤섬 유명 맛집을 검색해 가야겠다고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뒀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딤섬스퀘어를 가기로 정했으나, 홍콩 또한 한국처럼 명절 당일에는 휴무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소호까지 걸어가는 동안 유명 맛집들을 하나 둘 검색했고, 번번이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린흥귀, 딩딤 1968, 딤딤섬, 팀호완 딤섬 맛집은 줄줄이 셧다운이요, 안 되겠다 싶어 어제 방문한 모노가모스도 휴업. 2시간 동안 배회하다가 소호 쪽에 티우드 타이완 레스토랑에서 밥과 탕수육 반찬으로 겨우 먹었다. 명절에 홍콩 온 내가 잘못했다.
다른 곳은 중추절이라고 "휴무입니다"라고 외쳤는데, 란콰이퐁만큼은 예외였다. 명절날 갈 곳 없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받아주는 곳은 여기뿐이요, 이들을 위해 24시간 영업모드를 펼쳤다. 어제는 슬쩍 구경만 하고 지나갔지만, 오늘은 일찍 호텔로 돌아가할 일도 없어 가볍게 근처 펍에서 맥주 한 잔을 비우고 돌아갔다.
9월 25일, 홍콩의 마지막 날. 비가 오락가락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강렬한 햇빛이 하늘을 뒤덮었다. 마지막 홍콩 일정은 상당히 여유로웠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홍콩 전경을 내려다보는 것, 그리고 홍콩 스타의 거리에서 심포니 오브 라이츠를 구경하는 것.
여유롭게 호텔을 나선 뒤, 행선지는 다시 한번 소호. 어제 문이 닫혀 방문하지 못했던 식당들 중 하나인 침차이키로 갔다. 대기줄이 살짝 있긴 했으나, 이 집의 대표음식 완탕면을 먹는 데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넓지 않은 식당으로 입성해 자리를 앉은 뒤 한 번 둘러봤다. 많지 않은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홍콩 미슐랭 선정'이 주는 강력한 믿음 때문인 것 같다.
침차이키가 내놓은 완탕면은 미슐랭 1 스타를 향한 기대감과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한국 라면 같은 꼬들꼬들한 면발, 소고기와 어묵, 완탕 토핑이 만들어내는 훌륭한 맛 케미, 여기에 진한 울림을 선사하는 깊은 국물맛까지. 이것이다! 내가 이걸 먹으려고 줄 서서 기다린 것이다. 이게 스벅 커피값 가격(한국 기준)과 비슷하니 최고가 아니겠는가.
든든하게 브런치 한 끼를 먹은 뒤, 홍콩의 아담한 카페를 찾으러 좀 더 언덕 쪽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발견한 헤이즐앤허쉬. 중추절 연휴 여파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쉽게 찾아오지 않는 위치 때문인지 카페 내부는 포근한 음악 소리로 가득 찼다. 몇몇 손님들은 음악을 고막친구 삼아 책, 신문 등을 읽고 있었다. 아직 빅토리아 피크까지 가기엔 시간도 넉넉해서 가볍게 콜드브루 한 잔 주문하면서 카페 분위기를 즐겼다.
콜드브루 한 잔을 천천히 비운 뒤, 빅토리아 피크로 나섰다. 홍콩에 머물렀던 날 중 오늘이 가장 햇빛이 강렬했다. 피크 트램 정거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사람들이 돗자리며 신문지 등을 깔고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사실 어제도, 홍콩에 도착한 첫날에도 이들을 목격했다. 그래서 지나가면서 항상 궁금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길래 여기서 앉아있는 걸까. 이들을 보아하니 절대로 잠깐 앉아서 쉬다 갈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봤더니 이들은 홍콩 가정에서 집안일을 도맡고 있는 필리핀 출신 가정부들 '아마'였다.
홍콩에 오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아마'에 대해 본 적이 있었다. 맞벌이하느라 바쁜 홍콩 부부들을 위해 보모가 필요했고,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 출신 여성들이 '아마'가 되어 집안일을 돌본다고. 특히 필리핀 출신 사람들은 영어도 가능했기 때문에 일석이조라고 했다. 그러나 홍콩 정부가 아마를 집안에 두지 말라는 정책을 내놓은 것 때문에 이들이 주말만 되면 길바닥 신세를 지게 됐다고 한다. 중추절 연휴라 이들은 연휴 내내 자신이 일하던 곳에서 쫓겨나 강제 길바닥 생활을 하고 있던 것이다. 열심히 노동을 했는데도 돌아오는 대우는 쫓겨나는 신세라니. 씁쓸한 순간이었다.
빅토리아 피크로 가기 위한 트램 정거장에는 내국인, 외국인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순환이 빠른 덕분에 내 순서까지 오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트램을 타고 올라가는 데 창밖으로 보이는 시야들은 꽤나 신기했다. 6분 동안 1,278m 길이 선로를 따라 해발 33m에서 396m까지 오르는 동안, 고층건물들이 미끄러지듯 지나가서다.
신기하고 짧은 체험을 끝마쳤더니 빅토리아 피크 타워에 도달했다. 유리 벽으로 이뤄진 스카이테라스는 타워 꼭대기에 자리 잡은 뒤, 산 아래 펼쳐진 홍콩 섬과 바다 건너 까오룽 반도까지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스카이테라스 난관에 살짝 기대며, 홍콩 전경을 바라보며 멍 때렸다.
막상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왔는데,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샘솟았다. 트램 타기 전부터 봐왔던 수많은 인파 때문에 길목마다 너무나 붐볐고, 시간이 지날수록 타워 및 주변에 있는 사람 수가 늘어나고 있어서였다. 건물 안 버거킹은 정신없을 정도로 붐볐고, 정자형 전망대 라이언즈 파빌리온도 발 디딜 틈이 없게 사람으로 빽빽했다.
차라리 야경 보러 올걸 그랬나 후회감이 밀려왔다. 아니다, 마지막은 심포니 오브 라이츠라서 어쩔 수가 없구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하산행 트램에 올라탔다. 내려가는 것도 순식간. 정류장에서 계속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내려가다가 '영웅본색'의 또 다른 촬영지인 황후상 공원이 등장했다. 영화에선 주윤발이 선글라스를 장착한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현재는 갈 곳 없는 아마들과 공원을 지나쳐가는 관광객들 뿐이었다.
아직 오후 3시, 옅은 회색빛 구름이 지나가긴 했으나 더위와 햇빛을 완벽하게 막는 건 불가능했다. 홍콩에서 맛볼 수 있는 애프터눈 티 추천을 받았지만, 이를 즐기려면 홍콩 방문하기 몇 주 전부터 사전예약해야만 했기에 일찌감치 물 건너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사전조사를 할걸. 밖에서 계속 덥고 습함과 부딪치다 짜증이 나서 다시 숙소로 돌아가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열을 식혔다. 그러면서 홍콩에서의 마지막날을 장식할 행선지들을 열심히 찾아봤다.
중추절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여긴 꼭 가야지!"라고 확 끌리는 곳이 거의 없었다. 첫날 방문했다가 휴무를 맞이해서 실패했던 센트럴 플라자 전망대는 이날도 문을 열지 않아서 발길을 돌려 까오룽으로 넘어왔다. 심포니 오브 라이츠를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8시, 홍콩섬 위로 솟은 마천루의 불빛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에 맞춰 홍콩섬 불빛이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숙한 영화 OST와 클래식 음악은 홍콩 앞바다를 휘감았고, 불빛들과 레이저는 그 어떤 댄서들 부럽지 않은 현란함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화려한 광경을 두 눈으로만 보기 아까워서 나를 포함한 구경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셔터를 연달아 눌렀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사진은 어두운 하늘과 바다 때문인지 레이저 쇼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동영상도 생각만큼 이쁘게 나오지 않아서 약간 속상했다. 제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도 사람의 눈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30분 채 남짓 되지 않아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끝났다. 생각보다 짧게 해서인지 허무함이 밀려왔다. 출국 시간은 내일 오전 7시 15분인데, 밤새고 공항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출발하기 전까지 무엇을 해야 하나.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딜 가야 할까.
이래나 저래나 갈 곳은 란콰이퐁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곳만 유일하게 24시간 열려있었기 때문. 란콰이퐁 거리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술도 몇 잔 걸치면서 분위기를 살짝 즐기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쌌다. 택시 부르기 전까지는 호텔 TV 채널을 돌려보다가 '시그널'을 방영하는 채널에 멈춰 보다가 떠났다.
새벽 4시, 새벽의 홍콩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호텔을 통해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홍콩 국제공항으로 떠났다. 차량 하나 지나가지 않는 고속도로에선 내가 탄 택시의 엔진음 소리만 들렸다. 창문을 내려 홍콩의 새벽 바닷바람을 온전히 느꼈다. 짧은 홍콩 여행이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하필 명절과 겹쳐서인지 100% 중에서 50%만 즐긴 기분이었달까. 다음번에 다시 홍콩을 갈 일이 있다면, 그때는 현지 명절을 꼭 피해서 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