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4일~27일 기록 재구성
남아메리카 일주를 하기로 마음먹기까지, 나를 유혹했던 몇 가지 요소들이 있었다. 여행을 떠나려고 했던 2016년 여름에 브라질에선 리우 올림픽이 열리고, 페루에는 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추픽추가 있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자연이 낳은 모레노 빙하와 남미 3개국 경계에 자리 잡은 세계 최대 폭포 이과수, 다양한 자연환경을 띠고 있는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그리고 여기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우유니 사막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페이스북이었다. 내가 종종 방문했던 그룹 페이지 구성원 중 한 명이 한 여성 여행자의 피드를 공유했다. 해당 여성은 새하얀 색으로 뒤덮인 우유니 소금사막과 바람에 휘날리는 수많은 국기를 배경 삼아 짤처럼 손을 흔드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광경에서 기념 영상을 찍은 게 계속 눈에 밟혔다. 저긴 대체 어떤 곳일까 궁금했고, 그렇게 우유니 사막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우유니가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가야 할 여행지 50곳' 중 하나라는 것과 한국 여행객들의 로망인 것도 나중에 도착해서야 알게 됐지만.
2016년 7월 23일, 늦은 저녁 우유니 호야 안디나 공항. 라파즈 엘 알토 공항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공항 건물 바깥에는 싸라기 눈을 동반한 찬바람이 외벽을 일정 간격으로 때리고 있었다. 라파즈 한인민박 집에서 우연히 만나 우유니까지 동행한 주성 형님과 공항 앞에서 대기한 택시에 올라탔다. 나는 택시기사에게 간단한 스페인어로 인사한 후, 게스트하우스 주소가 적힌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택시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어둠을 뚫고 한 5분가량 달렸을까, 건물 불빛이 하나 둘 차창 안으로 들어왔다. 우유니 시내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내가 잡아둔 숙소는 중심가에서 도보 5분 이내 거리. 택시 운전사는 친절하게 숙소 앞에서 내려줬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호스트가 스페인어로 뭐라뭐라고 설명했다.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는 주성 형님과 생존식으로 짧게나마 배운 내가 하기엔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호스트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알바생 여자를 데려와 영어로 설명해줬다. 뜨거운 물이 잘 안 나오니까 아껴 쓰라는 뜻이었다.
예약한 방에 들어와 짐을 대충 풀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당장 다음날 잡아놓은 소금사막 선라이즈 투어 예약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 예약 취소였다. 나는 주성 형님을 끌고 중심가에 위치한 여행사 오아시스로 향했다. 단톡방을 통해 미리 팀을 구축한 한국인들이 오아시스 문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오아시스가 문 닫기 5분 전에 도착해 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새벽에 봅시다"고 짧은 한마디를 던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모든 조명이 사라지고, 별빛만 반짝이는 새벽 4시 오아시스 앞. 선라이즈 투어 일행이 집결했다. 드라이버 겸 가이드를 맡은 카를로스는 고무장화를 나눠주며 착용하라고 말했다. 소금사막에 물기가 많아서 발이 젖기 쉽기 때문. 하얀색 SUV에는 나와 주성 형님을 포함한 한국인 5명과 일본인 아키라를 태우고 소금 사막으로 향했다. 아직 어두컴컴한 바깥과 어느 순간 길이 사라진 구간에서 카를로스는 능숙하게 포인트 지점을 찾아 움직였다. 숙취처럼 잠이 남아서인지 사람들 간 대화는 없었다. 적막만 흘렀다.
30분쯤 지났을까. 카를로스가 다 왔다고 말했다. SUV에서 내려 드디어 소금 사막에 첫 발을 도킹하는 순간이었다. 아, 발이 시리다. 마르지 않은 물기와 영하로 떨어진 기온은 고무장갑을 뚫는 냉기를 선사했다. 발바닥에 핫팩을 붙였다가 화상 입었다는 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10분간은 괜찮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때아닌 혹한기 훈련에 대부분 SUV 주변만 몇 바퀴 돌다가 돌아왔다. 아키라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찍겠다고 초고성능 카메라를 들고 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SUV 안에서 파워 히터로 몸을 녹였다.
"Wake up!" 카를로스가 이야기했다. 일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아직 찬 공기가 가득한 소금사막에 다시 한번 발을 내디뎠다. 여전히 발은 시렸으나, 이미 한 번 담가서인지 버틸 만했다. 햇빛이 점점 지면을 비추면서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진짜일지 모를 만큼,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한 두 평행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 이것이 자연의 신비다.
이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은 저마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저마다 사진을 남기고 있을 때, 카를로스는 조용히 뒤에서 주섬주섬 단체 콘셉트 사진을 찍기 위한 세팅을 하고 있었다. 세팅이 끝났는지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더니 이런 포즈, 저런 포즈 취하면 된다고 짧은 영어와 바디랭귀지로 설명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고, 카를로스는 혼자서 몸을 비틀고, 스마트폰을 360도 회전하는 등 현란한 몸동작으로 예술혼을 불태웠다.
열심히 사진을 찍은 뒤, 카를로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스마트폰을 돌려줬다. 그의 결과물은 훌륭했다. 다년간 쌓은 가이드 겸 일일 사진사의 짬바가 잔뜩 묻은 사진들이었다. 그가 건치미소를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1시간 동안 카를로스의 포토타임이 지난 뒤, 각자 짧게나마 부여된 개인 시간을 통해 저마다 물 찬 우유니를 담아냈다. 동이 튼 뒤 소금 사막은 하늘을 그대로 흡수해 바다 같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바다 위에 나의 두 발이 떠있는 듯한 환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들(스마트폰, 고프로)을 총동원하여 셔터를 끊임없이 눌렀다.
SUV를 타고 다시 우유니로 돌아왔다. 시간은 오전 10시. 차에서 내리자마자 오아시스 여행사로 입장했다. 원래 목적이었던 소금사막에서 사진 찍기는 완수했고, 이제 다음 행선지인 칠레로 갈 차례. 나 같은 상황에 놓인 여행객 대부분은 우유니 2박 3일 투어를 하면서 칠레 국경을 넘어간다는 많은 후기들이 떠올라 그들을 따라 투어를 신청하러 간 것. 주성 형님도 칠레에서 아웃이었기에 함께 등록해버렸다. 이왕 이런 거 칠레까지 함께 합시다, 형님.
다음날 오전 10시, 아베니다 호텔 앞. 또는 오아시스 여행사 앞. 2박 3일 투어 원정대가 집결했다. 6명 정원 모두 제시각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글로벌 팀이 됐다. 각 대륙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피에르, 마틸다 커플은 프랑스에서 왔고, 여권 두 개를 자랑하는 세레나는 멕시코 출신(미국 영주권 때문인지 미국 여권도 보유 중이다). 티나는 한국에서 아주 멀지 않은 대만, 끝으로 2박 3일간 SUV 운전을 담당하는 호세는 볼리비아 토박이다.
첫 방문지는 우유니 시내 끄트머리에 위치한 열차무덤.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폐열차들이 한데 모여있는 곳인데, 몇 년 전부터 여기가 인기 스폿이 되었다는 호세피셜. 여행 후기들에선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본 것 같은데, 우리 팀이 방문했을 때 한국인은 나랑 주성 형님뿐이었지. 다 다른 피부색과 언어를 쓰는 사람들로 한가득했다.
그게 뭣이 중허냐, 스폿에 왔으면 일단 즐겨야지. 한쪽으로 기울어진 폐열차에 호기롭게 올라가서 포즈도 취해보고, 이제 아무도 달리지 않는 옛날 철로 위에서 화보에서 볼법한 다채로운 포즈도 취해봤다. 티나와 세레나가 찍어준 사진을 보면, 역시 내 얼굴이 나오지 않는 게 더욱 분위기 있어 보였다. 사진의 완성은 얼굴이지 않던가.
여행 중 고가의 물품을 들고 다니다 도난 위험이 있어 이번 여행에선 고급 화질을 자랑하는 디지털카메라는 없다. 그래서 아이폰6S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내려고 애썼다. 우유니 풍경빨이 워낙 뛰어나서 장비빨의 차이는 전혀 못 느꼈다. 이만하면 훌륭하지!
한 2, 30분 머물다가 호세의 SUV에 다시 탑승했다. 황량한 흙과 모래로 가득한 오프로드에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하며 룰루랄라 여행을 즐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새하얀 소금사막으로 배경이 180도 바뀌었다. 전날 새벽에 봤던 물 찬 사막과는 또 다른 물 없는 소금 사막. 물기 하나 없는 가뭄 땅바닥처럼 쫙쫙 갈라졌음에도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여전했다.
광활한 하얀 소금사막 위로 거대한 다카르 볼리비아 소금탑이 우릴 반겼다. 한국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매년 1월이 되면 다카르 랠리가 열린다. 이곳 우유니 또한 다카르 랠리 주요 코스 중 하나였단다. 그래서 우유니는 다카르 랠리가 열릴 때가 성수기라고 하더라. 2016년에도 다카르 랠리는 우유니를 지나갔다. 6개월만 일찍 왔더라면, 극한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오프로드 레이스를 두 눈으로 생생히 봤을지도 모른다.
레이서들이 지나간 뒤 놓인 소금탑은 사진 스폿이 되었고, 저마다 포즈를 취하며 렌즈로 담아냈다. 나 또한 지나칠 수 없어 세레나, 티나와 함께 찰칵. 다카르 소금탑 뒤로는 소금호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금호텔 옆에는 전 세계 각국 깃발들이 있었고, 여행객들은 자신들의 국가에 해당되는 국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반도와 정반대에 위치한 이곳 우유니 소금사막에는 태극기가 3개씩이나 위풍당당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내가 우유니에 오게 만들었던 그 여성이 남긴 영상이, 여기였다! 이미지로도 남기고 영상으로도 남겼다.
여행사에서 챙겨준 점심용 도시락을 소금호텔서 먹은 뒤, 소화할 겸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 지체하지 않고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이동하는 길은 참 신기했다. 전방에는 똑같은 하얀 소금사막만 보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무엇이 나오는지 알리는 간이 표지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 그래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안한 마음에 몰래 구글맵 GPS로 실시간 위치를 확인했다.
반면, 호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지도를 찾아보거나 하지 않고 계속 앞을 향해 달렸다. 해가 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움직이는 걸까. 조수석에서 그를 지켜보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다카르 랠리에 참가했던 레이서들은 어떻게 이곳을 달렸는지도 궁금해졌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금사막이어도 똑같은 환경을 계속 지켜보다 보니 점점 지쳐만 갔다. 그러다 꾸벅꾸벅 졸았고, 어느새 호세는 글로벌 팀을 새로운 스폿에 인도했다. 소금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언덕.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위로 뻗은 대형 선인장들이 실거주중이다. 바위 언덕 정상에는 볼리비아 국기가 꽂혀 있어 이곳이 볼리비아 영역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가볍게 산책 한 바퀴 할 수 있는 코스로 구성돼 부담 없이 빙 둘러보고 내려왔다. 그 사이에 바위언덕을 보러 많은 여행객들이 사륜구동차를 끌고 왔다.
숙소를 향해 다시 하얀 소금사막 위를 달렸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지고 있었고, 새파란 하늘은 구름과 함께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 또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호세가 이를 보더니 잠시 사진 찍고 가자고 정차했다. 말수가 적지만 아주 센스 있는 친구다. 호세 덕에 좋은 그림을 건지는 데 성공.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7월 우유니는 계절상 겨울이기에 아름다움만 잔뜩 묻은 사진과 달리 매우 추운 날씨다. 특히나 우유니 지역이 해발 3600m 이상 되는 고산지대라 저지대 겨울의 체감 기온으로 생각하면 오산. 일교차도 커서 해가 떨어지면 혹한기 훈련 때 벌벌 떨었던 시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도시처럼 발달된 곳도 아니어서 온수 샤워를 오래 사용하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만 했다. 끊임없이 불을 때긴 했으나, 한국의 강력한 온돌처럼 따뜻함을 발산하진 못했다. 그래서 이불 덮고 자는데도 하얀 입김이 선명하게 보였다. 침대는 온열이 작동하지 않는 온돌침대처럼 딱딱해서 요통 등을 감내해야 했다.
2박 3일 투어 2일 차 아침, 얼어 죽지 않고 다행히 일어났다. 주성 형님은 일찌감치 기상한 뒤 아침 산책을 다녀오셨다. 아침 식사 전에 자신이 히말라야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이미 이 이야기는 우유니에 도착할 때부터 계속되어왔던 레퍼토리였다. 히말라야 추위와 이곳 추위를 비교하면서 순수한 자연경관을 보는 게 참 좋다며, 나더러 히말라야 여행 꼭 해보라고 강력 추천하는 기승전결 구조였다. 이번에도 변함없었고, 알겠다고 대충 대답하고 넘어갔다. 이 형님의 히말라야 사랑, 자꾸 들으니 히말라야 여행이 살짝 끌리긴 했다.
2일 차부터는 전혀 다른 우유니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소금사막은 첫째 날을 끝으로 저 멀리 사라졌다. 대신 누런 모래와 흙, 자갈 등으로 채워진 알티플라노 고원이 글로벌 팀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만 더 달려가면 칠레 국경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알티플라노 고원을 종단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 자연경치가 좋았다. 한국에선 절대 만날 수 없는 그림체였기에 이 시간을 통해 내 눈에 잔뜩 담아서 머릿속으로 평생 기억하고 싶었다. SUV 차량은 다카르 랠리 경주차처럼 울퉁불퉁하고 흙먼지 날리는 오프로드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이정표도 없고 내비게이션도 없는 이곳에서 유능한 운전자 호세는 저 멀리 만년설과 산 모양을 보며 길을 찾아갔다. 문명시대인 현재에 접하기 드문 광경을 계속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을 차에 내려서 찬찬히 감상하고 싶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200km가 넘는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해야만 했기에 아무 때나 정차할 수 없는 노릇.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빠듯한 2박 3일 투어가 어그러지기 십상이며, 잘못했다간 칠레로 넘어가는 일까지 꼬이기 때문이다. 그건 안되지.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투어가 가능한 것도 볼리비아니까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던 호세가 세워준 곳은 라구나 카나파.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플라밍고를 보고 싶다면 이곳으로 오라. 실컷 볼 수 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플라밍고를 직접 지켜본 건 용인 에버랜드였는데, 그보다 더 가깝게 플라밍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붉고 핑크빛을 머금은 저 아름다운 자태에 흠뻑 빠졌다. 참지 못해서 스마트폰 셔터를 계속 눌러댔다.
플라밍고를 구경하고 온 뒤에 호세가 세팅해준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SUV 근처에 독특하게 생긴 녀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먼저 발견한 피에르-마틸다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쏘 큐트"라고 감탄했다. 이들이 반응하자 나도 자연스레 이 녀석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멀리서 봤을 때는 토끼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분명 토끼처럼 커다란 귀를 위로 쫑긋 세우고 있는데, 토끼와 다르게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뒷발 모양도 약간 달랐고, 꼬리도 토끼와 비교하면 엄청 긴 편. 보통 똘망똘망한 동물들의 눈동자와 달리 이 녀석은 반쯤 감긴 눈이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정체를 밝혀랏!
이 녀석을 보던 호세는 비스카차라고 대신 설명해줬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비스차카가 토끼랑 비슷한 생김새를 띠고 있으나, 설치류 쪽이란다. 가까운 친척(?)은 친칠라. 개체 수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나, 2박 3일 우유니 투어 하면서 비스카차를 많이 만났다는 게 함정이다. 내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어지는 알티플라노 고원의 뷰는 '끝내줬다'. 만년이 넘는 세월이 오랜 공 들여서 바람과 비 등 자연으로만 깎아놓은 기묘하고 신비한 형태의 바위 조각들과 감탄사를 유발하는 산맥들과 흰색과 파란색이 한데 어우러진 국립공원 호수들, 그 위로 날아다니는 플라밍고들과 자유로운 영혼 야마, 비쿠냐들까지. 기막힌 풍경의 연속을 감상하면서 환경보호의 중요성도 실감했다. 자연환경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면 이 광경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 여행을 하면서도 자연을 지키는 데에도 신경 쓸 때가 됐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느덧 2일 차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라구나 콜로라다에 도착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붉은 호수'다. 불타는 듯한 붉은빛을 띠는 호수가 알티플라노 고원과 환상의 컬래버를 이루고 있었다. 사진으로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이날 라구나 콜로라다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래서 조끼 패딩, 판초까지 여러 겹을 껴 입었는데도 찬 공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어 살을 찔러댔다. 바람 세기도 워낙 강했는지 다른 여행객들은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기도 했다.
전날과 달리 해가 떨어지기 전 숙소에 들어와 체크인했다. 숙소가 라구나 콜로라다 근처에 있었던 점도 있었고, 마지막 날에는 꼭두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었기에 일찍 휴식을 취하고 준비해야만 했다. 일찍 숙소에 들어와 함께 2박 3일 동행 중인 피에르, 마틸다, 세레나, 티나, 주성 형님과 함께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행선지 및 앞으로 계획 등도 공유했다. 한국인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우유니로 복귀한다고. 특히 세레나는 리우 올림픽을 보러 브라질로 넘어간다고 말했다. 기다려라, 나도 리우 갈 테니까.
의도치 않았는데, 이날 숙소에서 나는 다른 여행객들의 관심대상이었다. 동양인이 거의 없었던 숙소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대니 궁금했던 모양이다. 처음 보는 이들과 자기 전까지 스몰토크를 끊임없이 갔다. 그러면서 서로 다녀온 곳 이야기도 들려주고, 정보도 교류했다. 이렇게 두 번째 날 밤이 지나갔다.
새벽 3시 혹은 4시 그 사이쯤. 아직 새까만 하늘에 별이 자연조명 역할을 하고 있던 시각. 다들 하품을 한 번씩 발사하면서 숙소 밖으로 나왔다. 오랜 세월 2박 3일 코스 운전에 적응한 호세는 우리보다 일찍 나와 차를 대기시켜놓고 능숙하게 짐을 지붕에 싣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오로지 차량 헤드라이트 하나에 의존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여섯 여행객들은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몸을 SUV에 맡기고 다시 스르르 눈을 붙였다. 차가 덜컹덜컹 흔들려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에 들었다. 동쪽에서 해가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을 무렵, 차량은 어딘가에 멈췄다. 호세가 데려다준 곳은 솔 데 마냐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내 주변을 휘감았다. 진한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증기와 유황이 진동하는 솔 데 마냐나는 간헐천 지역이다. 간헐천이면 자고로 물이 분수처럼 뿜어 오르는 게 보통인데, 사막지역이라서 그런지 수증기만 자욱하게 가득 메우고 있다. 수증기로 덮인 물 위로는 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2, 30명가량 되는 여행객들이 노곤한 몸을 풀기 위해 수영복 차림으로 노천온천을 즐기고 있었다. 온천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수영복이라도 챙겨둘 텐데, 아쉬움에 발만 동동 굴렸다. 대신 솔 데 마나냐에서 보내는 30분 동안 수증기를 소재 삼아 세레나, 티나와 재밌는 영상을 찍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SUV는 계속 국경지대까지 달려 나갔다. 호세가 장시간 운전하느라 한두 번 10분가량 쉬는 것 제외하곤 오로지 남진이었다. 오전 9시 50분쯤 되었을까. 마침내 종착지인 볼리비아-칠레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나와 주성 형님만 하차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우유니로 돌아간다. 짧은 여행 동안 즐거웠다고 악수와 포옹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칠레 산 페드로 아타카마로 떠나는 작은 버스에 몸과 짐가방을 실었다. 탑승객을 다 확인한 기사는 칠레로 출발했다.
우유니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소금사막이 가장 아름다웠고 황홀했다고 말한다. 나 또한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우유니에는 소금사막만 있는 게 아니다. 그에 비견되는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갖추고 있다. 알티플라노 고원과 건조한 사막, 수많은 호수들, 자유로운 동물들까지.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그곳이 종종 잔상처럼 떠오른다. 언젠가 다시 한번 방문할 수 있을까. 한번 더 갈 수 있으면 좋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