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빌론' 리뷰
데미언 셔젤의 신작 '바빌론'은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한 문장을 189분 동안 이야기하고 있는데, 감독이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을 관람한 관객들마다 서로 다른 반응을 유발하고 있어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빛과 그림자 모두 적나라하게 보여준달까.
'바빌론'은 1920년대 할리우드를 한 세기 지난 오늘날에 소환해서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그 당시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함과 동시에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중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무성영화의 아이콘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와 화려한 할리우드 데뷔를 꿈꾸는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그리고 멕시코에서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영화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품은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 이야기를 풀어낸다.
189분 러닝타임 동안 '바빌론'은 마성의 매력을 뿜어낸다. 데미언 셔젤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연출과 화려한 색감, 그리고 압도적 미쟝센으로 쉴 새 없이 휘몰아친다. 이어 '라라랜드'에 이어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저스틴 허위츠의 강렬한 음악과 만나 환상적인 시너지를 낸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디에고 칼바 등 배우들의 호연도 강렬하다.
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바빌론'에게서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기운이 느껴진다. '아티스트'를 보는 듯한 흑백 무성영화들이 나오고, '맹크'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처럼 옛 할리우드의 향수를 자극한다. 또 데미언 셔젤의 대표작 '라라랜드'에 이어 달콤 쌉싸름한 맛과 재즈가 깔리고 '사랑은 비를 타고'가 '바빌론'에서도 깜짝 등장한다.
데미언 셔젤의 자가복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지점이 있다. 잭 콘래드, 넬리 라로이, 매니 토레스 3인이 높디높은 바벨탑에 올라가 밝게 빛나다 어느 순간부터 한 풀 꺾여 점점 잊혀 가는 이야기처럼 보이나 데미언 셔젤이 '바빌론'을 통해 내세우는 실질적인 주인공은 바로 '영화'다. 세 사람을 비롯해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 모두 영화와 관련되어 있고 이들이 속한 할리우드가 어떤 곳이며 할리우드에서 탄생한 영화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잭 콘래드와 할리우드 가십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스마트 진) 간의 대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글을 통해 잭의 시대가 저물어간다고 지적한 엘리노어는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의 재능으로 빚은 영화만큼은 천사의 영혼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라고 한마디 남기며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재각인시킨다.
그러면서 '바빌론'은 단순히 영화를 향한 무한한 헌사만을 전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영화를 '마법', '꿈', '희망'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바빌론' 초반 시퀀스에서 보여줬듯 난장판이자 동시에 추악하고 음침한, 인간을 소외시키는 양면성도 끄집어낸다.
그렇기에 등장인물의 내면보다 전체적인 그림으로 '바빌론'을 바라봐야만 한다.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오프닝 시퀀스나 방울뱀 대결 장면, 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가 안내하는 지하 동굴, 그리고 할리우드의 역사와 업적 등을 축약한 마지막 엔딩 5분 시퀀스에 좀 더 집중해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속 숨은 의미들이 모두 담겨 있어서다.
그렇다고 영화를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반응을 따로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이고 영화의 형태가 바뀌고 스타가 탄생한들 이를 소비하는 관객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잭 콘래드, 넬리 라로이, 그리고 매니 토레스 세 사람의 인생을 크게 좌우한 것도 관객들의 힘이 크다.
연장선상으로 '바빌론'을 향한 현재, 그리고 100년 뒤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누군가에게는 영화 그 자체를 느끼게 만드는 걸작으로 기억 남겠지만, 또 다른 이에겐 3시간 넘도록 난해하게 다가와 무모한 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호불호를 몰고 온 문제작(?)을 내놓은 데미언 셔젤의 다음 행보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영화를 향한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보여준 그였기에 다음 이야깃거리를 하루 빨리 만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