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쿨한 척

by 보나

누구나 한 번쯤은 쿨한 척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던, 친구이던, 지나간 옛 애인이던. 쿨한 척은 말 그대로 '척'이기 때문에 그 '척'뒤에는 항상 진짜 마음이 스물스물 기어 나와 씁쓸함을 남긴다.


스무 살 때 많이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다. 우리는 매일 만나서 밥을 먹고 영화를 봤으며, 집에 돌아가는 길엔 항상 그가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집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4층이었던 우리 집에 혼자 올라갈 때면 나는 항상 각 층마다 있는 복도 창문으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그가 서있었고, 그는 내려다보는 나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고는 했다. 나는 그때처럼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에, 감사해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4층이 너무 낮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늘 투덜대며 힘들게 계단을 올라가던 내가 빨리 창문에 도착하기 위해 들 뜬 마음으로 층층을 가볍게 올랐었다. 그렇게 우리는 달달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당연히 사귀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우리의 미래는 행복할 것이라 내 맘대로 예측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렀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예쁘게 치장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앞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예상 밖에도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였다.


순간 귀에서는 ‘쿵’하는 소리가 들렸고 손은 덜덜 떨려오며 식은땀이 흘렀다. 하얗게 채워진 나의 머릿속 때문에 속이 메슥거리고 이러다가는 곧 쓰러질 것 같아, 무슨 말이라도 내뱉어야 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고 애써 활짝 웃었다.


"그래! 친구! 그런데 우리가 친구지, 그럼 뭐니? 원래부터 친구였는데, 얘 참, 사람 무안하게 하네~ 어이 친구, 나 잠깐 나온 거라서 들어가 봐야 해 다음에 봐~"


이렇게 말했었나? 사실 뭐라고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냥 그 자리를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 내뱉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쿨한 척을 하고 그 곳을 나왔다. 하지만 마음속은 어지러웠다. 그냥 좋아한다고 나는 너랑 친구되기 싫다고 졸라볼 걸 그랬나, 아님 울기라도 해볼걸 그랬나. 그것도 아니면, 왜냐고, 왜 나는 너의 여자 친구가 될 수 없냐고 따져볼 걸 그랬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르고 도저히 집에 돌아갈 수 없어서 친구를 불러내 어마어마하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나는 술기운에 쿨한 척은 다 집어치우고 그에게 전화해,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며 욕을 퍼부었다. 그렇다. 아주 오랫동안 이불 킥을 할 만큼 창피한 술주정을 해댔던 것이다. 그 술주정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솔직해질 수 없었다.


쿨한 척을 들키는 일은 쿨한 척 할 때보다 더 처량하다.


그는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늘 춥고 외로웠던 나에게 그런 행복하고 따뜻한 감정을 알게 해 준 첫 번째 사람. 그래서 그에게 고마웠다. 물론 그는 날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끝내 전하지 못한 채, 그를 내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아마도 그 말을 전하지 못했기에, 쿨한 척을 해 버렸기에, 술주정을 한 뒤에도 기억 안 나는 척, 또 그 ‘척’을 했기에,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그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그 이후로 만나는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내 감정을 표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사람과 만나고 이별을 한 뒤, 찾아온 그 사람의 생일.


이제는 그 사람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도 따뜻한 생일을 보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축하 메시지와 함께 작은 선물을 보내주었다. 여기까지는 정말로 솔직한 내 감정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잘 지내냐는 답 문자가 왔을 때, 나는 또 그 쿨한 척을 하고야 말았다.


고맙긴, 그냥 별거 아니야, 생일이라는 알람이 떴길래, 그냥 넘어가기도 그렇고. 생일 축하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요즘 일도 바쁘고 운동도 하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 오빠도 잘 지내~


맙소사.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면 될 것을 또 주절주절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냈다.


물론 이번 쿨한 척은 이미 떠나가 버린 사람, 이미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씁쓸한 뒷맛은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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