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갑자기 생각이 난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항상 전화하면 기분 좋은 이야기가 오가기 때문에 오늘도 어김없이 재미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내 입꼬리는 벌써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음성에 나는 너무 놀라 급히 전화를 끊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당분간 통화하실 수 없습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지? 마지막 통화가 언제더라? 얼마 전부터 호주 워킹홀리데이 간다고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간다고 한 날짜가 언제였더라? 생각해 보니, 간다고 한 날짜가 이 쯤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그동안 연락이 없길래, 당연히 아직 한국에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먼 곳으로 꽤 오랫동안 가 있을 예정인데, 이렇게 말도 없이 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호주에 있어도 카카오 톡은 되겠지 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낸지 얼마 안돼서 답장이 왔다. 친구는 호주에 온지 벌써 이틀이고 연락을 못하고 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섭섭하다는 장난 섞인 문자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졸업하고 취업도 하지 않고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거의 모든 사람에게 연락도 안 하고 한국을 떠나왔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내가 한 명이라는 사실에 조금 섭섭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사는 게 바빠서 연락을 못했던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같은 대학을 다니며 틈만 나면 모여서 서로 사는 이야기부터 사회의 부조리함, 앞으로 우리는 좀 더 성숙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길 다짐하던 순수했던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이 떠올라 아련해졌다.
왜 그녀는 도망치듯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렇게 먼 호주로 떠났을까?
그녀는 늘 밝고 건강한 친구였다. 호기심이 많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밝고 긍정적이어서 항상 그 친구와 이야기하면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그런 그녀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많았다. 그 친구의 꿈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꿈을 꾸는 친구가 신기하고 멋있었다. 그리고 꼭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고 진심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친구는 꿈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우울해했다. 가족들의 반대와 가정형편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다며. 친구는 공부를 곧잘 했다. 대학교도 항상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는 수재였고 그녀가 쓰는 글은 군더더기 없이 똑 부러졌다.
그런 그녀가 취업을 하지 않고 돈도 거의 벌지 못하는 봉사활동 단체에 들어가서 평생을 전 세계 오지를 힘들게 떠돌아다니며 살겠다고 하는 것을 부모님이 쉽게 허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친구는 자신의 꿈을 접고 취업 준비를 했다. 물론 집에서의 반대 때문도 있었겠지만 친구 스스로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취업 준비를 하다 취업이 잘 되지 않자, 친구는 갑자기 배낭여행을 갔다. 그러곤 돌아와서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취업을 하기 전에 한 번은 꼭 다녀오고 싶다며, 지금 가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못 갈 것 같다며, 죽을 때까지 일할 건데, 지금 1년 잠깐 놀러 갔다 오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해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했다고 했다. 그런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사실 부러웠다. 그렇게 갈 수 있다는 것, 아니, 그런 결심을 할 용기가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남들 눈은 의식되었나 보다.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훌쩍 떠나버렸으니.
사실 우리나라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너무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혹은 내가 이런 옷을 입었을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예전에 영국 어학연수 시절,이태리 국적의 친구에게 남자친구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그 친구는 남자친구 사진을 보고 왜 한국 남자들은 전부 똑같은 안경을 쓰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학원에 있는 한국 남자 아이들이 전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 나는 그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지하철이나 거리를 돌아다녀 보면 다들 거의 똑같은 패션을 하고 있다. 머리색도 거의 비슷하고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들이 다 어디서 본 듯한 스타일이다.
왜 그럴까?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비슷한 스타일로 자신을 꾸밀까?
그건 아마도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습관 때문인 것 같다. “쟤는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옷을 입었지?” “쟤 어제랑 똑같은 옷을 입었네, 어제 집에 안 들어 갔나 봐.” “누구네 집 아들은 벌써 1년째 취업도 안 하고 놀고 있대.” “누구네 집 딸은 아직 결혼을 못했다나 봐.” 등등.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에 너무 관심이 많다. 그것이 관심으로만 끝나면 좋겠지만, 관심 끝에는 늘 혀를 끌끌차며 마치 그 사람이 세상의 이치에 벗어난 삶을 사는 이방인 마냥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면 그들은 늘 “난 그냥 걱정이 돼서......”라고 변명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걱정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고민하기도 전에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나를 맞춰 살아간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남들 다가는 대학가고, 대학졸업하면 남들처럼 취직하고, 남들이 결혼 할 나이 때쯤 되면 서둘러 짝을 찾아 결혼하는. 그런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점점 개성을 잃어간다.
그러니 그녀도 '당연히 취업을 해야 할 나이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철부지 딸'이라는 남들의 걱정이 듣기 싫어, 차라리 귀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나는 그런 걱정을 정말로 하지 않고 살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나는 남들의 걱정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분명 나도 남들에게 그런 걱정을 내뱉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 생각에서 벗어난다고 걱정하지 않기. 앞으로 내게 주어진 숙제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호주로 떠난 친구야, 거기서는 남들 눈치 보지 말고 자유롭게 너의 인생을 펼치렴. 그리고 진짜 네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행복하고 가치 있게 느껴지는 지 꼭 찾아서 돌아오길 바랄게. 그런데 만약 찾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하지는 마. 그것은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니까. 꼭 찾지 않아도 지금 현재 네가 생각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나하나 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굉장히 멋진 삶일 거야. 꼭 꿈이 있어야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그 꿈이 꼭 직업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좀 더 단단해져서 돌아오길 바랄게. 그리고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내가 언제나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