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한 없이 깊은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어둠 속 깊숙이 몸이 깔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그런 날.
그런 날에는 다운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해 하루 종일 말도 없이 멍하게 있는 일이 잦다. 그런 날이 오면 나는 벗어나려 하기보다 그냥 그 우물 속에서 조용히 소리를 죽이고 웅크린다.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이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나에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런 날들이 찾아온다. 그런 날, 비라도 내리면 우물은 평소보다 더 깊어지고 누군가는 나를 더욱 바닥으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우물 안에서 가만히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불규칙한 빗방울들이 땅바닥에 부딪히고 여러 개의 방울로 부서지고 그 방울들이 또 다른 방울들을 만드는 소리들. 그리고 그 방울들이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만나 흐르는 소리들을 가만히 듣는다. 빗소리는 시끄러운 듯 하지만 모든 소리를 내포한 듯 무거운 침묵의 소리 같기도 하다.
무거운 소리. 그렇게 무거운 침묵의 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끝도 없는 우물 덕분에 하늘의 빛은 바늘구멍만큼 작아져 있다. 그 크기로 나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가늠한다.
그렇게 우물 바닥에 있는 동안 나는 많은 생각들을 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언제쯤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까. 수많은 질문들만 쏟아질 뿐 답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소리쳐 물어봐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숱한 질문만 하다가 이내 지쳐 나는 잠에 빠져든다. 꿈에서도 나는 우물 안에 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똑같이 묻는다. 너는 도대체 누구이며, 왜 이 곳에 왔는지, 그리고 언제쯤 이곳을 벗어날 것인 지도. 하지만 나는 그 질문들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 체 눈을 뜬다.
다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물의 입구가 조금 커져 있었다.
'아... 이제 시간이 조금 흘렀구나.'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밖으로 나갈 준비가 아직 덜 되었다. 나는 누구인지, 이곳이 어딘지, 밖으로 나가면 무엇을 할지 아직 아무런 계획도 답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초조한 마음을 붙잡고 다시 열심히 질문을 던진다. 답을 얻기 위해 깜깜한 주변을 더듬더듬 짚어 본다. 하지만 냉정하게도 내 주변엔 촛불 하나 없다. 역시, 노래 가사에만 존재하는 일인가 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무엇이라도 짚일 듯이 다시 손을 뻗어보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빈손뿐이었다.
그렇게 허공을 허우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우물의 입구는 내 몸을 훤히 다 비출 정도로 커져있다. 그렇게 밝은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린 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팔만 뻗으면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두렵다. 그토록 시간이 흐르길 기다려온 나는 이제 나갈 수 있는데도 나갈 수가 없다.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보길 거부하고 깜깜한 바닥만 내려다보며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밖으로 밀었다. 그렇게 밖으로 갑자기 나온 나는 한참을 서 있다가, 너무 환한 빛에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우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곳엔 우물이 없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우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곳에 우물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게.
그렇게 나는 어쩔 수 없이 환한 햇살을 받으며 앞으로 걸음을 뗐다. 나도 우물이라는 곳에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한동안 앞으로, 앞으로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긴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 내 앞에는 우물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또 그 곳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