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사랑한 소녀,
별보다 반짝이는 사랑을 만나다

by 보나

스물두 살쯤 됐을 때, 우연히 숙모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었다. 면허를 딴 지 얼마 안되어 차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평소 예쁘고 갖고 싶다고 여겼던 차를 숙모가 운전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해서 차에 타자마자 차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화려하고 귀여운 외관에 비해 내부는 심플하고 깔끔했다. 이 차의 매력은 역시 귀엽고 세련된 외관이군, 하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숙모가 내게 물었다.


“너는 요즘 뭐에 관심이 많니?”


내가 너무 차를 구석구석 두리번두리번 둘러봤나? 뜨끔해져 쑥스러워진 나는 평소 관심 있었던 이 차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고 괜히 요즘 기타를 배워볼까 생각 중이라고 둘러댔다.


그러자 숙모는 나를 보며, 기타는 왜?라고 물었다.


그냥 요즘 하고 싶은 게 많아진 것 같아요. 기타도 배워보고 싶고, 미술도 배워보고 싶고.. 그쪽 길로 가고 싶어서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해보고 싶은 거죠. 근데, 그것들을 취미로 하기에는 돈도 많이 들고, 또 아직 진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데 취미로 하는 것도 너무 이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래 저래 혼란스러워요.


둘러대며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내 솔직한 고민이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학교를 다니며 신나게 놀았던 1년. 그러고 나서 찾아온 허무함. 나는 누구인지, 나는 뭘 좋아하는 지, 뭘 하며 먹고살아야 할지, 슬슬 고민이 되던 시절 이었다. 그리고는 다이어리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과 배우고 싶은 것들을 적었었다. 그것들 중에는 숙모에게 말했던 기타도 있었고 미술도 있었다. 실제로 배우기 위해 알아보기도 했지만 독학으로 하기엔 너무 막막했고 학원을 다니기엔 너무 비쌌다. 물론 열심히 알바하면 그 정도 돈은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 돈을 투자할 만큼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이야기를 들은 숙모는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를해줬다.


숙모는 어릴 적부터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별들이 반짝이는 모습,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들을 이으면 생겨나는 별자리들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늘 별에 관한 책들만 읽었고 자신이 평생 결혼도 안 하고 밤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사는 천문학자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 숙모가 20대 초반, 그 당시 내 나이쯤 되었을 때, 삼촌을 만났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숙모는 아주 어릴 적부터 별밖에 모르던 자신이 삼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게 될 줄 아무도, 숙모 자신조차도 몰랐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네가 생각하는 너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고. 지금 절실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또 지금 별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절실해질 수 있다고. 그러니, 지금 어떤 것을 해서 미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걱정하고 미리 계산해서 현재를 살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을 그냥 하면 된다고.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나 자신도 모르는 거니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숙모는 웃으며, “내가 이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생판 관심도 없었던 분야의 회사를 다니며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절 나는 숙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 깨달음을 얻기 보다는 우습게도, 별을 사랑했던 순수한 소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그 이야기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서 한 동안 숙모의 어린 시절 모습을 혼자 그려보고 그런 사랑을 꿈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내 반쪽을 찾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언제나 내 짝은 어디 있을 까,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언제쯤 나는 앞뒤 안 가리고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까, 고민했고 그런 사랑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 내게 숙모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내가 딱 꿈꿔온 사랑이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런 사랑을 동경할 뿐, 그런 사랑을 하지는 못했다. 남자친구를 사귀고 사랑하기는 하지만, 한 번도 눈이 멀 정도로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했다. 내가 하는 사랑은 드라마틱하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늘 뭔가 허전하고 공허하며 재미가 없었다. 늘 나는 왜 하나에 열중하지 못할까. 남들 눈 다 무시하고 사랑에 확 빠져버리지 못할까? 자책하며, 급기야는 나의 이런 점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돈이나 현실에 개의치 않고 푹 빠져버리는 열정이 없는 것이라며 자학했다.


나는 그런 자학들을 하며 나이를 먹어갔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열정은 없어졌고 자학은 점점 심해졌다. 그러다 결국 나는 자학하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나는 그런 열정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냥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사람들이 내가 남자친구와 6년째 연애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다들 대단하다고 하고, 멋있다고도 하고, 언제 헤어질 생각이냐고 놀리기도 하고, 결혼할 것이냐고 묻기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별로 대단하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내 6년의 연애가 회사에서 큰 이슈가 되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나의 연애를 돌이켜 보았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동안 남자친구는 군대도 다녀왔고 미국도, 중국도 다녀오고 나는 영국도 다녀오고 학생에서 이제는 직장인이 되었고. 등등. 그동안 물론 힘들고 헤어지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잘 극복해 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대단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냥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특별히 헤어질 이유가 없어서 만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내 연애가 남들에게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나도 숙모의 사랑 이야기처럼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봤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상관없이 그냥 그 사람이라서 좋은 사랑. 굳이 드라마틱하게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 혹은 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또는 로미오의 죽음에 같이 죽기를 결심한 줄리엣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나의 연애도 나름 열정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내 연애를 두고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있을 땐, 모임에만 나가면 다들 언제 헤어질 거냐고, 곧 헤어질 거면서 면회는 왜 가냐며 떠들어댔고, 심지어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는데도 추근덕 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인은 남자친구가 아니라며. 취직을 하고 나서는 남자친구가 아직 학생이라 하면, 주변에서는 언제 헤어질 거냐고, 빨리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하지 않냐며, 걱정 어린 말들을 하곤 했다.


남의 연애에 관심이 참 많은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듣는 참견이겠지만, 지금껏 그런 말들에 흔들리지 않고 잘 사귀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사람의 주변 상황이나 현실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고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남들 눈 신경 쓰지 않고 한 사람만 바라보는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열정이 있다고. 무엇에 푹 빠질 수 있는, 앞뒤 안 가리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리고 우습게도, 나도 그런 열정이 있으니,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숙모가 예전에 한 말처럼, 그 시절 내가 절실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니, 절실했고, 간절했고 또 열정적이었다.


별을 사랑했던 소녀가 별보다 빛나는 사랑을 만나,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고 있는 것처럼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미래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미리 계산하며 현재를 살지 말고, 그냥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들에 열중하면 된다. 혹시 미래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더라도, 그때 지금을 돌아보게 된다면, 현재를 즐기고 열심히 살아가는 내 모습이 밤하늘의 별보다 반짝이지 않을까?






커버 :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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