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첫 만남에서 어떤 이야기로 시작하나요?

by 보나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는 지은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지은이는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아이였다. 멋 부리길 좋아하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학교에서 보내는 여느 고등학생들과는 다르게 지은이는 점심만 먹고 하교 했고, 저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덩치에 맞지 않게 지은이는 말이 없는 학생이었다. 항상 한 곳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지은이는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고, 그냥 가만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은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폐아’였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는 항상 한 학년에 한 명씩은 지은이 같은 친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반 아이들도 그런 지은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다. 그냥 지은이라는 아이가 있다는 정도만 인지하고 있었지, 그 아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거나 하지는 않았던 듯했다.


나와 지은이는 꽤 오랫동안 짝을 했다. 나는 지은이와 짝을 하고 나서야, 지은이가 말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은이는 늘 혼자서 들릴 듯 말듯 한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 지은이를 가만히 쳐다보다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뭐해?”

지은이는 눈이 동그레 져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지은이의 눈이 참 크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은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너 눈 참 크다.”

지은이는 계속해서 아무 말없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웃으며 지은이에게 말했다.

“나는 내 눈이 좀 커졌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 엄마는 요즘 다 눈이 큰 애들만 있으니까, 내 눈이 작아서 더 특별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나는 눈이 작은 게 싫어. 나 쌍꺼풀 수술할까?”

내 말이 끝나고도 한참을 가만히 있던 지은이는 조심히 입을 뗐다.

“지금 몇 시야?”

나는 바로 앞 칠판 옆에 붙어 있는 시계를 보고, “엇! 쉬는 시간 2분 남았다. 나 체육복 빌려야 되는데! 잠시만, 나 옆 반에 갔다 올게!”라고 말하고는 뛰어 나갔다.


그 뒤부터 지은이는 틈만 나면 내게 몇 시냐고 물어봤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수업 종이 쳐서 급히 자리에 앉은 다음에도, 나랑 눈만 마주치면 항상 지금이 몇 시인지 물어봤다. 나는 그때마다 대답해 주다가, 하루는 짜증이 나서 말했다.


“바로 앞에 시계 있잖아! 왜 맨날 나한테 물어보니? 네가 말해봐, 지금 몇 시야?”

지은이는 바보같이 웃으면서 시계를 보더니, “10시 30분”이라고 말했다.

지은이의 바보 같은 웃음에 나도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시계 잘 보네! 이제부터 네가 시계 보는 거야, 알겠지?”

그다음부터 지은이는 나만 보면 시간을 알려주며, 맞는지 확인을 했다.

“11시 10분, 맞지?”

“12시 20분, 맞아?”

“1시 30분, 맞지?”


항상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시계 같은 지은이를 못 말리겠다고 하면서도 나는 그때마다 대답해 주었다.

“응 맞아. 11시 10분. 배고프다.”

“응 맞아. 12시 20분. 졸려.”

“응 맞아. 1시 반. 넌 곧 집에 가겠네. 부럽다.”


그렇게 지은이와 나의 대화는 항상 시간이었다. 시간을 빼고는 다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나는 지은이에게 많은 말을 했지만 지은이가 나에게 한 말은 시간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은이가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거나, 아니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지은이가 매일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을 찾아와서 내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오늘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오늘은 내가 뭘 해줬는지, 알림장에 뭘 써줬는지 등등. 나와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지은이는 선생님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지은이랑 많이 친한가 보다고, 지은이에게 잘해줘서 고맙다고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이것이 고마운 일인가? 그리고 나는 지은이에게 특별히 잘해준 적이 없었다. 그냥 여느 친구들처럼 대했을 뿐이었다. 지은이의 알림장을 챙겨준 것은 다른 친구에게 내 필기를 빌려주는 것처럼 사소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지은이 이야기를 하니, 엄마는 웃으며, 내가 지은이 같은 사촌오빠를 두고 있어서 그런 것일 거라고 했다.


내게는 어릴 적부터 지은이와 같은 병이 있는 사촌 오빠가 있었다. 사촌 오빠라고는 하지만 사실 나랑 한 살 차이도 안 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명절이면 항상 둘이서 친구처럼 잘 놀았다. 그리고 나는 그 오빠가 조금 아프다는 것을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몰랐다. 나랑 있을 때는 그냥 여느 내 친구들과 다른 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한 번은 그 오빠를 두고 어른들이 안타까워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른들이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왜 오빠를 보통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명절날 어김없이 사촌 오빠를 만났다. 안 본 사이 키가 20센티도 더 자란 오빠는 나를 보고는 웃으며 인사를 한 후,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내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커다란 곰 인형이 있었다. 그리고는 곰 인형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오빠는 핸드폰 화면을 내 얼굴에 바짝 가져다 대고는 좌우로 흔들면서, “안녕? 누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오빠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키가 180도 넘는 덩치에 맞지 않게 곰 인형 빙의를 하는 오빠가 다르게 느껴진 것은 그 사이 마음이 훌쩍 큰 나 때문이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가만히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오빠에게 나는 웃으며 오빠의 핸드폰 화면에 대고 인사를 했다.


“안녕! 넌 어디서 왔니?”


내 말을 들은 오빠는 환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물개 인형, 팬더 인형을 보여주며 인형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 후로 오빠는 나만 만나면 항상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해가 지날수록 인형 친구들은 많아졌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그렇게 오빠의 곰 인형과 말을 하는 나를 바라보던 큰아빠가 한 날은 내게 말했다.


오빠는 그 인형들을 통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라고. 나를 만나서 반가운데, 처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인형들을 보여주며 말을 거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말을 걸었을 때, 대화가 잘 통한다 생각되면 그때부터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그렇구나. 그렇게 오빠는 내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구나. 그리고 지은이도 내게 시간을 물어보며 항상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구나.


큰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학교에 가서 나는 지은이가 시간을 물어보고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항상 시간만 물어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지은이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노느라, 공부하느라 바빴고, 또 시간이 흘러 지은이와 다른 반이 되니, 지은이는 자연스럽게 내게서 잊혀졌다.


그리고 한참이 흘러 스무 살이 돼서 처음으로 소개팅을 한 날이었다. 처음 한 소개팅 자리가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 순간이 너무 어색해서 잠깐의 침묵도 허락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쉼 없이 떠들어대는 나에게 그는 “하하! 굳세어라 금순이 같네요!”라고 말했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나가는 아무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창피했다.


‘굳세어라 금순이라니! 내가 대체 무슨 말들을 지껄인 거지?’


그 뒤에 에프터는커녕, 주선자에게 그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연상의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거절의 말을 했다고 한다. 주선자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날 나는 지은이가 생각났다. 너도 이렇게 힘들었구나, 너도 내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구나. 나는 그때서야 지은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은이 같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것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그렇고, 면접이나, 스피치 대회 혹은 PT자리에서도 첫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그 시작이 항상 두렵고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황들을 여러 번 겪으면서, 조금씩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긴다.


그것이 곰 인형이던, 시간이던. 우리는 각자 첫 시작에서 어색하지 않을 저마다의 곰 인형과 시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지은이도, 사촌 오빠도 나보다 먼저 그런 상황을 겪어봤을 것이다. 남들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조금 부족하다고 여기는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먼저 느껴봤기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날은 어쩐지 그런 지은이가, 사촌 오빠가 더욱 어른스럽다고 느껴진 날이었다.




*지은이라는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