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의 화투 치는 소리

할머니들이 한바탕 화투판을 벌이실 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했다

by 보나

쉬는 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곤 하는데, 한 번씩 할머니 집에서 잠을 잘 때는 그럴 수가 없다. 보통은 이렇게 말하면, 당연히 “아, 할머니가 일찍 일어나서 밥 먹으라고 잔소리해서?”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할머니들의 화투 치는 소리에 눈을 뜨기 때문이다.


아이고, 성님 또 싸셨네!

아이고, 광박에 피박이니, 이게 얼마여?

하하하, 이번에 고를 혀, 말혀?! 에라 모르겠다, 고! 투고여, 투고!


화투 패가 부딪혀 나는 소리, 누군가는 이겨서 웃는 소리, 누군가는 계속해서 싸서 안타까워하는 소리, 그것을 지켜보는 누군가는 놀려대며 낄낄낄 웃어대는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소란스럽다.


그렇게 한 바탕 재미있게 노시는 할머니들이 거실에서 판을 벌이고 있는데, 문을 열고 나가기란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눈을 뜨고 나서도, 방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도저히 화장실이 가고 싶어 안 되겠을 때 겨우 밖으로 나오곤 했다. 다 큰 처녀가 부스스하게 나오는데도, 할머니들은 웃으며 예쁘다고, 젊어서 좋다고 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자신의 순서가 돌아온 할머니만 빼고.


내가 뭘 좀 챙겨 먹으려 부엌으로 가면 할머니는 자신의 패를 한 손에 쥐고 바쁘게 이 것 저것 가리키며 반찬들의 위치를 알려주신다. 그렇게 바쁜 할머니의 몸짓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할머니는 내 웃음에 쑥스러우신지 “웃기는!”하며 등을 ‘툭’ 치고는 바삐 자리로 돌아가셨다.


엄마와 이모는 할머니께서 친구 분들과 집에서 화투 치시는 것을 못 마땅해하곤 했다. 특히 이모의 초등학생 딸을 할머니 집에 맡겨놓고는 하는데, 교육상 안 좋을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모의 걱정도 일리가 있었다. 화투 치러 오시는 분들은 고스톱 최대 인원 3명 보다 배로 많았고, 한 분은 광을 판다고 해도 다른 몇 분은 고스톱 판을 둘러싸고 똥을 내라는 둥, 초단 비상이라는 둥, 고도리로 판을 뒤집었다는 둥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시고, 한 분은 텔레비전 앞에 누워서 리모컨을 누르고 있는 환경이 초등학생에게 좋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인 동생은 사실 학원 끝나고 비는 시간은 놀이터에서, 집 앞 공원에서, 친구 집에서 요리조리 돌아다니기 바빴고, 할머니 집에 있는 시간은 화투 치는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신 뒤인 저녁시간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모는 매번 전화로 할머니께 잔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오늘은 화투 안쳤다고 거짓말을 하시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모는 엄마에게 할머니가 자꾸 거짓말을 한다며 흉을 봤다.


하지만 어느 날 할머니 몸에 작은 암 덩어리가 있다는 소식이 우리 가족에게 전해졌고, 우리는 못된 암 덩어리가 할머니 몸을 다 삼켜 버릴까 조마조마했다. 수술을 위해 입원한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 평소 뚱뚱하다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몸이 그날따라 작고 가녀려 보였고, 입원 복을 입고 있는 할머니가 어색했고 마음이 아팠다.


그날 나는 문득 오래전 부산에서 학교 다닐 때가 생각났다. 그때 할머니는 갑자기 내게 연락해서는 얼른 와서 과일 좀 챙겨가라고 하셨다. 급하게 물어물어 찾아간 할머니의 숙소에는 하우스를 방불케 하는 화투판이 벌여져 있었고, 수많은 뽀글 머리 할머니들이 신중하게 화투를 내리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때에도 어김없이 한 손에 화투 패를 들고 버선발로 나와, 바쁜 몸짓으로 미리 싸 두었던 과일 봉지를 내게 전해 주며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그때 나를 놀라게 했던 숙소 가득 계시던 뽀글 머리 할머니들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요즘 오시는 할머니들보다 배로는 많아 보였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작은 병원 침대에 가녀리게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며, 어서 빨리 일어나셔서 다시 건강하게 화투를 치실 수 있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다행히도 할머니 몸속 암 덩어리는 다 제거되었고, 5년 동안 재발 없이 건강해진 할머니는 예전처럼 활발하게 화투를 치셨다.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어느 누구도 할머니가 화투 치는 것에 불만을 표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리가 안 좋으신데, 오래 바닥에 앉아 있지 말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 치시라고 권해 드리기도 했다.


여전히 할머니들의 화투 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밖으로 나가기가 민망해서 방안에서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할머니들이 한 곳에 모여 한바탕 화투판을 벌이실 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했다.




커버 : SBS <자기야 - 백 년 손님>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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