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음이라는 것은 가슴이 아니라 눈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너 사람이 눈으로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알아?
글쎄. 사람이 눈으로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정확하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 그럼 그런 눈빛 본 적 없어?
글쎄. 정확히 어떤 눈빛을 말하는 거야?
예전에 내가 아는 어떤 애가 있었어. 그 애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애를 볼 때면 눈에서 빛이 나고는 했어. 그 애의 눈은 정말 실눈 뜨고 있는 것처럼 작은 눈이었거든? 눈을 뜨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그런 눈.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그 여자애를 볼 때만은 정말 눈이 살아있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어. 그 여자애가 혹여나 다치거나 아플까 봐, 그 애의 눈은 항상 그 여자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도 항상 그 애는 그 여자애만 쳐다보고 있었지. 그 애의 눈을 바라볼 때면, 마치 이 세상에 그 애와 그 여자애 둘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어.
그 애가 그 여자애를 정말 좋아했나 보네.
맞아. 그 애는 그 여자애를 정말 좋아했어. 아니, 사랑했어. 나는 그 애를 보면서 사람이 사랑할 때 어떤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는지 그 황홀한 눈빛이라는 게 뭔지 처음 알았어.
황홀한 눈빛이라.. 그래서 그 애와 그 여자애는 잘 되었어?
아니, 얼마 안돼서 그 여자애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폈어. 나는 그 여자애에게 말했지. 절대 그 애를 버리지 말라고. 그 애는 정말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여자애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그 여자애는 그 애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어.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애에게는 매력이 없다는 거야. 자신이 아무리 허무맹랑한 말을 해도 그 애는 다 믿을 거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의 편이 될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냥 그 뿐이었데.
그 애를 보면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서 자신을 그렇게 좋아해주는 게 오히려 부담스럽고 그 마음이 무겁기만 했데. 그래서 그 여자애는 좀 더 가볍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어.
그 여자애가 나빴네. 그럼 그 애를 떠나버리지 왜 바람을 폈데?
글쎄. 그 부분에 대해 나도 말한 적이 있었어. 그럴 거면 차라리 헤어지고 나서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 그런데, 그 여자애는 그 애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하겠더래. 그리고 헤어지자고 말해도 그 애는 자신을 자꾸 잡을 거고 그러면 자신은 또 그 애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여자애는 그 애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다 믿어주고받아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오로지 자신밖에 모르는 남자니까. 자신이 바람을 펴도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 애라면 그럴 거라고.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여자애 진짜 나쁜 애네. 그래서 그 애는 그 여자애를 다시 받아줬어?
뭐 그 뒤로 그 여자애와는 그런 대화를 하지 않았으니, 진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뒤로 둘이 다시 사귄다는 말을 들었어. 그래서 다들 그랬지. 역시 그 애는 그 여자애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정말 대단하다고.
그런데, 그러고 얼마 안돼서 그 둘이 다시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어. 이번에는 그 애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더라고.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애와 술을 먹은 적이 있었어. 그 애에게 물었지. 바람 핀 걸 알고 나서 다시 사귀었으면서, 왜 헤어졌냐고. 그때 그 애가 그랬어. 그렇게 한 번 바람 핀 걸 알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그 여자애를 못 믿겠다는 거야. 그래서 자꾸 의심하게 되고, 보채게 되고, 그러다 보니 싸움이 잦아졌고,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아서 안 되겠더래. 그래서 그냥 헤어지는 게 낫겠다 싶어서 헤어졌다고 했어.
그래, 그 애가 잘 생각했네. 그런 나쁜 여자애와는 헤어지는 게 나아.
그런데, 그 애는 끝까지 그 여자애를 사랑했던 거야. 그때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그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었어. 그 애는 세상 모든 것에서 상처받은 것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눈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 애는 쓰디쓴 술을 목으로 넘기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다 잊은 척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그런 눈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 상처받은 눈.
그런데, 그 눈빛에는 원망이 없었어. 웃기지? 그 애는 그 여자애를 원망하지 않았어. 이렇게 된 게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 애 정말 멋있는 애구나.
그때였는지도 모르겠어. 그 애를 사랑하게 된 것이. 그렇게 세상 쓸쓸하고도 고독한 눈을 하고 있는 그 애에게 다시 예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황홀한 달빛 같은 눈으로 돌려주고 싶다고. 그리고 그 눈이 나를 향하는 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
그래서? 그 눈빛을 봤어?
아니. 슬프게도 그 애는 나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어.
그 술자리 뒤로 우리는 자주 만났어. 나랑 있는 동안은 그 여자애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고, 그냥 서로에게만 집중했지. 나도 항상 그 애가 그 여자애를 정말로 잊은 것일까 궁금했지만 두려워서 묻지 않았어.
그리고 그 여자애에게서 연락이 와도 답장하지 않고, 술에 취한 그 여자애에게 매몰차게 대하는 그 애를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하지만 그 게 다야. 그 애는 끝까지 나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어. 나를 바라볼 때 그 애의 눈빛은, 뭐랄까 슬픈 눈에 가까웠던 것 같아.
슬픈 눈?
응. 글쎄 그 눈이 진짜 슬픈 눈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애는 나를 바라볼 때 그런 눈을 하고 있었어. 그 애는 한 번씩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 애가 아무 말도 안 하고 흔들림 없이 빤히 바라보면, 나는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꼈어.
그 애의 그 눈이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내가 그 애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켜버린 것처럼 떨리고 부끄러웠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애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었지.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그 애를 보채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어. 나를 사랑하는지, 아니,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지, 보채기 시작했어.
참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 그 애는 항상 눈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때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고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자꾸 보채고 나를 사랑해달라고 애원했어.
그리고 결국 그 애의 입으로 거절의 말을 하게 됐을 때, 그 애는 슬픈 눈을 하고 있었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됨을 슬퍼하는 것 같은 그런 눈. 그래서 나는 조금은 덜 아팠던 것 같아.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 눈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얼마쯤은 걱정하는, 자신을 향한 내 마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그리고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그런 눈.
그 애의 그 눈에 가슴이 많이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그 따뜻한 마음에 조금은 위로가 됐던 것 같아.
음. 그래도 그 애가 너를 전혀 안 좋아한 것은 아니었나 봐.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너를 바라보았겠지.
그럴까?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애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게 그렇게 참을 수 없이 슬펐어. 그 여자애를 바라보듯 나도 그렇게 바라봐주길 얼마나 원했는지 몰라.
어리석게도 나는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그 애의 눈빛에 반하게 된 거야. 그 눈빛이 너무 빛나고 아름다워서 갖고 싶었던 것 같아. 그 눈빛이 나를 향한 눈빛이 아닌데,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말이지. 뜨겁고 반짝거리는 불빛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나는 그 애의 뜨거운 눈빛이 나를 향하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는지도 모르겠어. 결국에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만약에 말이야. 그 애 같은 눈을 가진 누군가를 만난다면, 누군가가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봐준다면, 그때는 그 애를 진정으로 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