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회사에서는 '너를 사랑한 시간' 드라마가 인기다. 이 드라마로 인해 이진욱은 뭇 여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드라마가 방영한 다음 날이면, 다들 모여서 '나에게도 저렇게 나만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행복한 상상을 한다.
현실에서 극 중 최 원 같은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어떨까?
학창 시절부터 늘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고, 고백했다가는 그렇고 그런, 친구보다 못한 사이가 될까 두려워서 마음을 숨기며 그림자처럼 그녀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그런 남자. 그것도 무려 17년 씩이나.
예전에 나에게도 그런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극 중 오하나처럼 그를 내 옆에 오래 두지는 않았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매몰차게 그를 무시했고 그 어떤 여지의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그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한국을 떠나 멀리 간다고 했을 때에도 "잘됐다"고 무심한 듯 말했었다. 물론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는 내 섭섭한 마음을 들키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연하게 웃고 있는 나를 꼬집으며 눈치를 주던 친구의 찡그려진 미간도, 내 표정을 보고 가슴 아파하던 그의 얼굴도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가 한국을 떠나기 하루 전, 학교 앞에 찾아왔었다. 그때에도 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교문 앞으로 나갔고, 그와 짧은 작별인사를 나눴다. 정말 짧은 인사였다.
"잘 가. 건강하고."
어색해하는 우리를 보고 친구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오버스럽게 인사했고 그 다음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또다시 그 찡그려진 미간에 어쩔 수 없이 나도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잠깐 악수를 나누고 그는 뒤돌아 걸어갔다.
뒤돌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느껴진 마음의 동요에 혼란스러웠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뛰어가서 그를 붙잡아 세웠다. 그런데 막상 붙잡아 세우고 나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그렇게 멀뚱히 서있다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안해
그 순간 그 말이 왜 튀어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냥 미안하다고.
내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잘 몰랐다.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몇 년이 지나고 정말 좋아했던 남자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었을 때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 미안하다는 말의 잔인함을.
미안하다는 말에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예전의 그의 일그러진 얼굴처럼 내 얼굴도 그렇게 처량할까 생각했다.
그렇게 어떤 이에게 상처를 주고, 어떤 이에게 상처를 받으면서 남녀가 서로 같이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좋아했던 그와 나를 버렸던 그에게 고마웠다. 그들 덕분에 다음 번 사랑을 만났을 때 기적이라고 느낄 수 있었으니.
서로 손이 부딛혀야 소리가 나는 박수처럼
사랑도 마음의 타이밍이 맞아야
꽃을 피울 수 있다.
즉, 최 원 같은 남자가 아무리 오랫동안 내 옆에 있는다고 해도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이 무겁기만 할 것이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기적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