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은 맛있지만!
[단편] 시리즈는 모두 픽션입니다 :)
이러다가는 주위에 남아있을 친구는 한 명도 없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그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의 이 시간을 견디기엔 너무나 지루하고 또 지루했다. 이어지는 결혼 이야기, 정확히는 ‘결혼식' 준비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 열을 올리며 말하는 은정의 친구는 결혼식이 몇 달 남지 않았다. 신혼집과 가구, 한복, 예복, 청첩장까지- 그녀의 이야기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은정은 마음과는 달리 그래도 성의 있는 리액션을 하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그녀도 상처 받지 않고, 예비 시어머니를 욕보이지도 않고, 그녀와 어머니 사이에서 존재감 없는 그녀의 남편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더라도 노력하고 있는 남편을 칭찬하고 인정해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모두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할 것이고.. 몇 해 전 은정이 결혼할 때 신경을 많이 써준 친구들이기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맞다고, 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어쩐지 점점 이야기는 흐릿하게 들려온다. 오늘 낮에 읽다만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고, 오랜만에 안부를 전해온 예전 상사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 못한 게 생각이 났고, 그다음엔 이직할 회사에 보낸 지원서는 확인이 되었는지 궁금해졌고..... 2시간째 붙이고 앉아있는 카페 의자에서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였다.
어느덧 결혼한 지 4년이 되어가는 은정, 사실 은정은 결혼을 하며 생활이 많이 나아졌다. 대학교 입학부터 고시원을 다니다 룸 셰어를 통해 방을 마련해 서울살이를 시작했는데,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은정에게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생활이 은정에게 도저히 맞지 않았다. 하지만 비싼 월세보다는 이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고 사는 게 현실과 더 맞다는 생각에 꼬박 10년을 그 집에서 지냈다. 평일에는 어김없이 출퇴근을 하고 또 야근과 밤샘이 잦았던 회사생활로 집에서의 생활 흔적이라고는 침대의 이불, 화장대 위의 너저분한 화장품들 옷가지 그뿐이었다. 셰어하우스의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불편해 식사는 거의 밖에서 해결했고 방이 좁았기에 물건 하나 사더라도 고심 고심하며 샀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렸다. 결혼을 하기 위해 짐 정리를 하는 동안, 필요한 생필품 말고는 옮겨놓을 화분이나 액자 따위의 소품이 단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은정은 잠시 멍했다. 단출한 짐들을 보며 묻는 남편에겐 다 버리고 정리하고 왔다며 둘러대었다. 그전에 혼자 살던 시간은 상관없다. 이제 내 취향껏 집을 꾸밀 수도 있고, 모든 게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다.
은정은 소박한 식물들을 기르고 싶었다. 서로 키가 다른 화분을 나란히 두고 아침마다 물을 주거나, 작은 씨앗을 사서 꽃을 피워보기까지의 과정을 보며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싶었다.
또는 강아지를 키워보고 싶었다. 퇴근하고 들어오는 나를 항상 맞이해주는 작은 존재를 내가 책임져 보고도 싶었다. 또 친구나 연인과 함께 찍은 사진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벽 한가득 붙여놓고도 싶었다. 하지만 책상을 놓고 그 옆에 서랍장을 놓고, 또 그 옆에 옷장을 놓고… 빈 벽이 없을 만큼 가구들은 은정을 둘러쌌다. 번잡한 방안을 훤히 비추는 형광등은 꺼두고 책상 위 스탠드만 켜놓고 있는 편이 나았다. 은은한 주광의 빛이 그나마 이 네모진 방 안의 가구들을 조화롭게 보이게 했다.
결혼을 하고 전셋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은정은, 그동안 고생했던 생활에서 벗어난 그 자체에 기뻤고 뿌듯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어느 시간에든 요리를 할 수 있었고, 내가 원하는 식물을 들여놓아도 되었고, 강아지를 키울 수도 있었다. 결혼을 함과 동시에 이직을 위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던 은정은 자신에게도 이런 안정과 행복을 찾았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삶에 처음으로 만족했다.
모두에게 결혼은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다녔다.
둘도 좋지만 혼자가 더 좋다고 말하며 고민하는 6년째 연애 중인 친구에겐 혼자서 느끼는 외로움은 그만하면 충분히 즐겼다고, 앞으로는 남편과 투닥거리며 사는 게 진정한 사람 사는 맛이라고 말했다.
회사에서 혼자 짊어지는 일들이 많아 이젠 견디기 힘들다며 퇴사를 말하는 친구에겐 어서 결혼을 하라고, 결혼을 하면 아무래도 남편이 있다 보니 기댈 사람이 생겨 지금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 은정은 혼란스럽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헤엄쳐 다니는 수많은 물음표들, 그릇의 표면 위까지 가득 차서 흘러넘치고야 말 것 같은 이 생각들이 버거웠다. 은정 자신의 삶이, 이 일상이 과연 스스로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거대한 흐름 안에서 운 좋게 흘러들어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시험지의 정답처럼 2번이든 3번이든, 단 하나의 답을 내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묵직한 불덩이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을 뜨겁게 데웠다.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의 디테일, 신랑 신부를 대하는 웨딩플래너의 자질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땅콩처럼 느껴졌다. 허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입안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맴도는 짭조름한 땅콩 몇 알들.
3시간쯤 지났을까- 카페 유리문을 나서니,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쳤다. 추워진 날씨를 얘기하며 저마다의 옷깃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은정 자신도 목도리를 귀까지 더 올려 매었다. 어떻게 가냐는 질문은 바람소리에 한번, 두툼한 외투에 한번 더 걸러져 희미하게 들렸다.
결혼식 날 보자는 말과 함께 손짓으로 인사를 하고 서로의 집 방향으로 빠르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