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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슈라 May 02. 2020

빨간 얼굴

심장이 쿵쿵 울리며 달아오르던 열기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몇몇 친구들의 추천으로 반장선거에 나가게 되었다. 

반장을 하고싶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도 않았는데, 싫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못해 어찌어찌 그렇게 된 것이다. 반장이 되기 위해 반 아이들 앞에서 연설을 해야하는 사실에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집에 가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올 때 얼마나 심장이 쿵쾅댔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심장이 쿵-쿵- 울리면서 얼굴까지 확 달아오르던 그 열기가.


그 날은 금요일 저녁이었고, 어떤 일이었는지 고모들과 사촌동생들이 집에 놀러와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자리였다. 반장선거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식사를 하고 후식을 먹을때가 되어서 과일을 깎고있던 엄마에게 슬쩍 털어놓았다. 엄마는 무려 그 사실을 식구들이 둘러싼 그 자리에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우리딸 반장선거 나간대! 친구들이 추천해줬대나봐!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이미 내가 걱정이 한보따리가 되어 말한 것을 알고있었던 것 같은데 왠지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랑을 하고싶으셨던 것 같다. 엄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의 반장선거가 화두로 올랐고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더 시끌해졌다. 고모들은 나를 중심으로 둘러싸며 연습을 시켜주겟다고 했고(왠지 나를 재미있어한 듯 하다),  귀까지 벌개진 얼굴이 된 나는 얼어버렸다. 들뜬 식구들 앞에서 더듬더듬 입을 뗐는데,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는다며 얼굴이 또 빨개졌다는 웃음섞인 말에 나는 후다닥 화장실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며칠 후 열렸던 반장선거에 나가 어떻게 하고 내려왔는지, 신기하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ㅡ 그 때부터 내향적인 나의 성격을 정확히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있으면 한 발짝 물러나 나의 존재감을 숨기려 하거나, 하고싶은 말이 있음에도 선뜻 하지 못했다. 그때처럼 곧, 심장이 두근대며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기에.  다른이에게 빨간 얼굴을 보여주는 일은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빨간 얼굴 때문에 싫은 별명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과학시간에 '화산'에 대한 영상을 보는데 '마그마' 가 붉게 타오르는 장면이 나왔을 때 같은 반 남자애는 내 이름을 외치며 내 별명을 마그마라고 붙여주기도 했다. 그 별명은 내가 얼굴이 제일 빨개졌을 때 불리곤 했고, 그 단어를 들었을 땐 귀까지 뜨거운 게 느껴졌다. 이러다 얼굴의 모든 세포가 다 터져버리는 것 아닐까하는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하며 

항상 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히느라 바빴던 나의 어린 시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시간. 내가 정말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하며 기억을 곱씹어보고 있었을 때

새로운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그 반장선거에서 결국은 준비한 말을 다 하고 내려왔던 것이다. 

떨리는 목소리와 붉어진 얼굴로 전날 저녁까지 달달 외운 내 글을 보며 한마디- 한마디- 해내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던 것이다. 투표를 할 때까지도 여전했던 나의 붉은 홍조는 그날 하교를 하며 친한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야 가라앉았던 것 같다. 그 시간을 해냈다는 후련함과 설레임에 기분좋은 두근거림을 느꼈던 것 같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채 나의 의견을 말해야할 때나 낯선 이를 만날 때, 내향적인 나는 쉽게 긴장을 하고 때때로 얼굴이 빨개진다. 심장이 쿵쿵 울리며 나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을 인지할 때쯤 다시 숨을 쉬어본다. 

전날 밤까지 고민하며 글을 준비했던 어린 나를 떠올리며 '한마디, 한마디' 다 해내길 바라곤 한다. 

그 시간이 지금의 나에게 누구보다ㅡ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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