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은 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작가님의 세심함이 담긴 문장들이 결국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던 어떤 기억의 조각을 건드려버렸기 때문입니다. '박완서' 라는 세 글자를 알게 된건, 초등학교 다닐적 엄마가 읽던 책에서였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라는 제목이었는데, '싱아가 뭐야?' 하며 질문했던 기억이 나요.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특히나 그 시절 엄마는 평일이고 주말이고 구분없이 늘 바빴습니다. 어쩌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 오면 동생과 나는 엄마 무릎에 서로 누우려고 자주 투닥거렸고 엄마도 그런 우리를 뒤치닥거리해주며 쉬는 게 쉬는 것도 아닌것처럼 그렇게 시간을 보냈는데, 엄마 손에 그 책이 있었습니다. 몇 장 읽다가 잠들었다가, 다시 깨서 또 읽다가, 우리 끼니와 간식을 챙겨주고 다시 돌아와 또 읽고, 할머니의 부름에 집안일을 하다 돌아와 또 읽고. 그렇게 틈틈이 읽어가는 책이 궁금해서, 엄마가 접어놓은 책장을 잘 표시해두고 뜻도 모른채 첫장부터 펼쳐 읽어보곤 했어요. 희미한 기억속에서 그 책은 아름답고 따뜻한 시골풍경이 나오고 나랑 비슷한 또래의 꼬마가 나왔던 것 같고... 끝까지 읽었는지는 글쎄 잘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와 따뜻하게 보내는 주말 오후...그게 박완서 작가님의 첫 인상이었습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세세한 일들에 관심을 주고,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이야기하는 작가님이기에 제 마음 어딘가를 건드려 이렇게 눈물까지 흘리게 할수 있었을 거에요. 작가님의 글을 통해, 잊고지냈던 혹은 잊고싶었던, 열정이 넘치고 강했던 그 때의 나를 마주한 나는, 다시 그때처럼 열정적인 두근거림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보잘 것 없이만 느꼈던 내 일상과 내 사람이 다시 반짝거리며 소중하게 다가왔어요. 성실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일상을 가꾸며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하고 진솔하자고 다짐했어요. 가식없이 꾸밈없이 나를 다정하게 안아주기도 하고, 따끔하게 야단을 치기도 하면서 진솔하자 생각했습니다.
세대를 넘어 엄마에 이어 딸인 나에게까지 전해온 작가님의 따스한 위로. 내 엄마와 같은 작가님이 있었기에 딸인 나는 든든하게 세상에 나설 용기가 생겨납니다. 따스한 위로와 강인한 용기를 주는 글. 저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 이렇게 써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들 특히 엄마가 좋아했던 그 소설부터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너무 좋은 글귀들이 많아 써두는게 아쉬울만큼이에요.
그 중에서도 작가님만의 온전한 행복이 전해오는 듯했던 문장을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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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있고, 알맞은 촉관의 전기스탠드가 있고, 그리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라도 할라치면 여왕님이 팔자를 바꾸쟤도 안 바꿀 것 같이 행복해진다.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220p